냉면국물은 리모컨이다

맛보다 먼저 다가오는 감각, 차가움에 대하여

by 한이람



고깃집에서의 마지막은 늘 그거였다.
살얼음이 둥둥 떠 있는 냉면 한 그릇.


눌러본 적은 없지만, 확실히 무언가를 잠시 멈추게 하는 맛.


누군가는 면만 건져 먹고 끝냈지만,
나는 꼭 국물까지 다 들이켰다.
그 차가운 국물 한 입이
기름기 많던 갈비의 여운을 싹 지워주는 기분이었으니까.


심지어 여름이면, 국물 속 얼음을 일부러 오래 씹어 삼키곤 했다.

양념으로 달궈진 입 안을 식히는 그 순간이,

어릴 적엔 고기보다 더 기다려지는 마무리였다.


그런데 옆자리 외국인의 반응에, 문득 멈칫했다.

“이건 왜 이렇게 차갑지?”
“국수도 차가운데, 국물까지 다 마시는 건 더 신기해.”


하긴,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다.

중국에도 량피가 있고, 일본에도 자루소바가 있지만
그건 소스에 가볍게 찍어 먹는 방식이다.
국물을 통째로 들이켜는 차가운 면요리는 흔치 않다.

차가운 면은 있어도,
차가운 국물까지 삼키는 문화는 드물다.


차가운 감각은, 생각보다 더 본능적이다.

얼려 먹는 요구르트, 하겐다즈 스틱바, 쥬시쿨 같은 것들.
입에 넣는 순간, "맛있다"보다 "차갑다"가 먼저 튀어나온다.

심하면 이가 시큰하거나,
혀끝 감각이 순간적으로 사라진다.




뜨거운 음식은 입을 벌리게 한다.
차가운 음식은 입을 오므리게 만든다.

감각이 닫히는 방향으로 반응한다.

단지 온도의 문제가 아니다.
차가운 감각은 '끄는' 감각이다.

무언가를 지우고,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게 한다.


코스요리 중간에 나오는 셔벗을 떠올려보면,


그건 입가심용 디저트가 아니라,
감각 리셋용 장치다.


여운을 지우고, 새로운 맛을 부르는 작은 시간.


앞 요리의 여운을 끊고,
다음 요리를 더 뚜렷하게 느끼게 하려는 의식 같은 것.


냉면도 어쩌면 비슷한 역할을 한다.

뜨거운 고기의 여운을 밀어내고,
입 안을 깨끗이 식힌다.

포만감보다,
"이제 끝났다."
이 감각을 먼저 불러온다.


감각을 껐다 켠다니,
이쯤 되면 음식이 아니라 리모컨이다.


냉면 국물을 다 마신 뒤
기억나는 건 맛이 아니라—

“아, 이제 진짜 끝났다…”는 깨달음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다시 입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이 있다.


냉면 국물은,

내 여름의 '마지막 페이지' 같은 거였다.


아쉬움도, 미련도 없이

딱 거기까지가 좋았다 싶은 맛.

그래서 더 기억에 남는다.




입에서 시작된 감각은,
때로 기억과 구조로 이어집니다.
‘씹다가 멈칫’은 감각의 흐름을 기록합니다.


이 시리즈는 1편부터 읽을수록 더 맛있어져요.

프롤로그부터 맛보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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