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은 유진이 남긴 가죽 다이어리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여기 어딘가에 단서가 있을 거야. 유진은 분명히 진실을 숨기면서도 무언가를 기록했을 거야.’
하진은 다이어리의 페이지를 한 장씩 천천히 넘기며 유진의 생각과 감정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다이어리의 초반은 평범한 일상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가 자원봉사하며 사람들을 돕는 일에 대해 쓴 글들로 빼곡했다.
“오늘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어서 감사했다. 누군가를 돕는 것이 내 삶의 의미야.”
역시, 다시 읽어봐도 유진다운 기록이었다.
하진은 마치 유진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연애할 때조차 그녀는 누군가를 돕는 일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곤 했다.
그러나 일기가 점점 후반부로 갈수록 유진의 감정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무리 도와도 왜 이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
“이 세상이 나를 지치게 해... 내가 선택한 길이 맞는 걸까.”
하진은 겉으로는 항상 밝았던 유진이, 속으로는 깊은 불안과 혼란에 시달렸음을 느꼈다.
타인을 도우며 자신의 삶을 채워나갔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구원받지 못했던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야.”
그것은 일기의 끝에 적힌 메모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아마도 이 글이 쓰인 날짜일 것이다.
“5월 24일.”
연도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하진은 날짜를 입 밖으로 내며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그는 그 숫자를 되새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날짜... 어디서 봤었는데.’
분명히 이 날짜는 CCTV에 포착된, 그 정체불명의 남자를 만났던 날이었다.
하진은 이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이건 대체 무슨 의미지?’
유진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야’라고 적은 말의 의미가 단순한 결심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메모와 날짜가 CCTV와 일치하지 않았다면, 단순히 그녀의 다짐으로만 생각했을 텐데...
이제는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다이어리를 덮으려던 하진은 문득 가죽 다이어리의 마지막 안쪽 주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검지를 그 주머니 안에 찔러 넣었다.
그러자, 손끝에 무언가가 만져졌다.
하진은 즉시 검지와 중지를 좁혀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집어냈다.
꽉 끼는 주머니 속 물건을 힘주어 끌어내자,
그것은 가지런히 접힌 한 장의 종이였다.
‘여기 이런 게...’
예상치 못한 수확에 호기심을 참지 못한 하진은 서둘러 그 접힌 종이를 펼치기 시작했다.
하진이 펼친 종이에는 단순한 메모가 아닌 ID와 PW가 적혀 있었다.
그 순간, 하진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의문들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유진이 왜 이걸 남긴 거지? 이 ID와 비밀번호는 대체 어디에 쓰는 거야?’
종이에 적힌 ID와 PW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었다.
ID: Eugene_HJ
PW: 0524 Memories!
그는 이 정보들이 무언가 중요한 곳으로 가는 열쇠일 거라고 직감했다.
‘5월 24일... 역시 중요한 날이었어. 근데 이 비밀번호는 대체 어디에 쓰는 걸까?’
하진은 고민하다가 유진의 평소 습관을 떠올렸다.
그녀는 중요한 것들을 늘 비밀 이메일이나 온라인 메모장에 저장해두곤 했었다.
아마 그녀는 하진이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하진은 그녀가
지키고 싶은 비밀이라도 그저 다 포용하고 싶었었다.
혹시 그곳에 남겨둔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진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유진의 노트북은 이미 경찰에 압수된 상태였다.
사건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노트북은 분명 경찰서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터였다.
‘경찰서에 직접 가야 하나...?’
하지만 하진은 단순히 노트북을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사건과 관련된 모든 물품은 수사 중인 증거물로 분류되어 있었고,
이 사건에서 제외된 하진에게 쉽게 접근을 허용할 리가 없었다.
하진은 한동안 고민에 잠겨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뒤엉키며 불안감과 의문이 커져만 갔다.
유진이 남긴 ID와 비밀번호. 그리고 그날 CCTV에 찍힌 남자.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확실한 답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에 쥔 종이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0524. 이건 분명 단순한 날짜가 아니야...”
고민하던 하진의 눈빛이 점점 단호해졌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어.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해.’
결심한 듯 하진은 종이를 손에 꼭 쥔 채 방을 나섰다.
하진이 들어선 곳은 유진 사건을 담당한 형사들이 모여 있는 경찰서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방 안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그중 가장 먼저 하진을 알아본 사람은 박 형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