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흔적
비행기가 서서히 착륙하며 흔들렸다.
안내 방송이 흘러나오고, 승객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서진(소피아 한센)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뿌연 하늘, 빽빽한 빌딩들, 그리고 출입국 심사장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
덴마크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이곳은 그녀의 출생지였다.
그러나 낯설었다.
공항 내 전광판에는 익숙하지 않은 한글이 빼곡했다.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 휴대폰을 보며 통화하는 목소리,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사람들.
하지만 그녀는 그들과 같지 않았다.
‘나는 한국인이야? 아니면 덴마크인이야?’
여권을 들고 입국 심사대로 향했다.
줄을 서며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여권 보여주세요."
출입국 심사관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덴마크에서 오셨네요. 한국에는 왜 오셨습니까?"
서진은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제 출생 기록을 확인하려고요."
심사관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권을 스캔했다.
"체류 기간은 얼마나 되시죠?"
"일단 일주일 정도요."
입국 도장이 찍히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녀의 뿌리를 찾는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입국장을 나서며 휴대폰을 켰다.
기자 김주현에게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낯선 번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한서진 씨 맞으시죠?"
남자의 목소리였다.
조금 낮고 차분한 목소리.
"네, 그런데 누구시죠?"
"김윤우 기자입니다. 김주현 기자의 요청을 받아 대신 나왔습니다."
서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김주현 기자님은 왜 못 오신 거죠?"
"오늘 갑자기 다른 취재가 잡혀서요. 서진 씨의 건이 급하게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고 해서, 제가 대신 맡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순간 망설였다.
처음 연락을 주고받았던 사람은 김주현이었고, 이제 와서 다른 사람이 나온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럼… 김주현 기자님과 연락은 가능하신 거죠?"
"물론입니다. 제가 팀을 같이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어디서 뵐까요?"
"강남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시죠. 주소 보내드릴게요."
잠시 후, 휴대폰으로 주소가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한적한 동네였다.
앞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실내는 조용했다.
커피 머신 소리가 은은하게 들렸고, 창가에 앉은 한 남자가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서진 씨?"
"네, 김윤우 기자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먼 길 오셨네요. 덴마크에서 바로 오신 거죠?"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제 입양 기록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요."
윤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잘 오셨습니다. 생각보다 복잡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가방에서 몇 개의 서류를 꺼냈다.
"이게 한서진 씨의 출생 기록입니다. 그런데…"
서진은 서류를 확인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뭐죠?"
그녀의 이름이 분명히 적혀 있었지만, 또 다른 아이의 정보가 겹쳐 있었다.
입양 기록이 두 개였다.
한서진 – 1993년 4월 21일 출생 (입양일: 1995년 6월 3일)
김지윤 – 1993년 4월 21일 출생 (입양일: 없음, 기록 삭제됨)
"김지윤…?"
처음 보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생년월일이 같았다.
윤우는 서류를 가볍게 두드렸다.
"서진 씨, 혹시 이런 가능성을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어떤 가능성이요?"
윤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금까지 살아온 당신의 정체성이…
사실은 다른 누군가의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서진은 손을 꽉 쥐었다.
"… 그게 무슨 말이에요?"
윤우는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1990년대 한국에서는 해외 입양이 활발했어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입양 중개인들이 개입하면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습니다.
가령, 부모가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아이가 해외로 보내진다거나, 혹은 한 아이의 신원을 조작해서 입양 서류를 만들기도 했어요."
서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럼… 저도 그런 사례라는 거예요?"
윤우는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확인된 기록으로는, 한서진 씨와 김지윤이라는 아이가 같은 날 태어났고,
한 명은 입양되었고, 다른 한 명은… 기록에서 사라졌습니다."
"기록에서 사라졌다고요?"
"네. 존재 자체가 지워진 거죠. 마치 이 세상에 없었던 아이처럼."
서진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제가 그 아이일 가능성도 있다는 거네요."
"네, 그렇죠."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만약 그녀가 진짜 김지윤이라면,
그녀의 인생은 애초에 다른 사람이었어야 하는 걸까?
서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았다.
김지윤.
그녀와 같은 날 태어났지만, 기록에서 사라진 아이.
‘만약 내가 김지윤이라면… 내 입양 기록은 누구의 것이었던 거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녀의 존재가 조작되었을 가능성, 그리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희생되었을 가능성.
윤우는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출생 병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부터가 문제입니다.
과거 불법 입양 중개인들은 가짜 병원 이름을 만들어내거나,
아예 출생 기록을 날조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서진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그럼, 내 기록은 완전히 날조된 걸 수도 있단 말이에요?"
"가능성이 큽니다."
윤우는 서진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혼란스럽고, 불안해 보였다.
당연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감각은 생각보다 훨씬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건 없어요. 단서를 찾아야죠."
윤우는 노트북을 열어 뭔가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우선, 입양 기록과 연결된 고아원을 찾아야 합니다.
입양되기 전, 어디에서 지냈는지 확인하면 뭔가 나오겠죠."
그는 손가락으로 몇 개의 파일을 넘겼다.
그리고 한 곳에서 멈췄다.
1993년, 서울. 성덕 고아원.
2002년 폐쇄, 관련 기록 없음.
"이게 마지막 기록입니다.
입양 서류에는 없지만, 정부 데이터에서 확인된 흔적이에요."
서진은 파일을 들여다보았다.
오래된 문서 속에서, 자신이 입양되기 전 거주했을 가능성이 있는 고아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성덕 고아원… 그럼 거기 가 보면 뭔가 알 수 있을까요?"
서진의 질문에 윤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률이 높습니다.
다만, 2002년에 폐쇄된 곳이라 현재 건물 상태도 알 수 없고,
운영했던 사람들이 어디 있는지도 불분명하죠."
그녀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럼, 먼저 그 고아원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찾아야겠네요."
"맞아요."
윤우는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선배. 혹시 성덕 고아원에 대해 아세요?"
통화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성덕 고아원? 거긴 90년대 후반에 큰 문제로 뉴스에도 나왔던 곳인데?"
윤우는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문제요?"
"입양아 관련 서류 조작 혐의로 한동안 조사받았었어.
그때 담당자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네."
윤우는 서진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서진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알아볼게. 그쪽도 조심해라."
전화를 끊고 윤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지 않은 흔적이 있는 곳이었네요."
서진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럼… 내가 입양된 과정도 그 문제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겠네요."
"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이 사건을 파헤치는 게 위험할 수도 있어요."
윤우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계속할 건가요?"
서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네. 시작했으니까 끝까지 가야죠."
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우선, 성덕 고아원에 대해 더 조사해 봅시다."
성덕 고아원의 폐쇄 기록을 조사하기 위해, 윤우는 경찰서에 연락했다.
입양 중개인과 연관된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오래된 서류를 확인해야 했다.
"담당 형사와 약속 잡았어요.
그쪽에서 협조해 준다고 하네요."
그렇게 두 사람은 경찰서로 향했다.
서진은 긴장된 표정으로 경찰서를 바라보았다.
오래전 이곳에서 어떤 기록들이 사라졌을까.
그리고, 자신이 정말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을까.
윤우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김 기자, 오랜만입니다."
윤우와 익숙한 듯 가볍게 악수를 나눈 그는, 강한 인상을 지닌 사람이었다.
무뚝뚝한 표정, 단정한 옷차림, 짙은 눈빛.
그는 곧장 서진을 바라보았다.
"이분이?"
"네. 한서진 씨입니다. 덴마크로 입양된 분인데,
성덕 고아원과 관련된 서류를 찾고 있습니다."
정태준은 서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입양인…이 시군요."
그의 시선에는 단순한 형사의 관심을 넘어선 이해와 공감이 담겨 있었다.
마치, 이 사건을 남의 일처럼 보지 않는 듯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오래된 서류지만, 확인할 수 있는 게 있을 겁니다."
경찰서 내 서류 보관소.
정태준이 서랍에서 몇 개의 파일을 꺼냈다.
"2002년 성덕 고아원이 폐쇄될 당시, 몇 가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점이 있네요."
서진이 파일을 받았다.
성덕 고아원 – 폐쇄 사유: 미등록 입양 서류 문제
입양된 아이들 중 일부 기록 없음
"여기 보세요."
정태준이 가리킨 곳.
한서진 – 기록 없음
김지윤 – 기록 없음
"뭐죠…? 아예 이름이 없잖아요?"
윤우가 파일을 살펴보며 말했다.
"이름이 없다는 건… 삭제되었다는 뜻이겠죠."
서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럼, 제 기록은 어디에 있는 거죠?"
정태준은 조용히 말했다.
"아마…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곳에 있겠죠.
그 기록을 찾으면, 사건의 실체가 보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