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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사라진 기록

by 아이린

"입양된 아이들 중 일부 기록 없음."

서진은 노랗게 바랜 문서를 손끝으로 따라가며 문장을 반복해 읽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경찰 정태준은 한숨을 쉬며 서류를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입양 중개인들이 흔히 쓰던 수법입니다."

그는 서류 뭉치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아이들의 신분을 바꾼 후, 원래 기록을 지워버리는 거죠.
입양된 아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되고,
부모들은 영영 아이를 찾을 수 없습니다."

서진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럼… 저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제 기록이 없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까요?"

정태준은 서진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무겁고도 신중했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불안감이 그녀의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지금껏 살아온 삶이, 전부 거짓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

그녀가 알고 있던 ‘한서진’이라는 이름조차,
진짜 그녀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

"진짜 저는 누구였던 걸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공기 중에 묵직하게 울렸다.
윤우가 천천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걸 찾으러 온 거잖아요."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어딘가 부드러웠다.
마치 그녀가 무너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듯한,
그러나 현실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 담긴 목소리였다.

서진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 진실을 찾기 위해 온 것이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이 고아원을 운영했던 사람들은 어디 있을까요?"

서진은 문서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하지만 오래된 고아원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당시 고아원장이 있었을 텐데요."

정태준은 오래된 서류를 뒤적이며 말했다.
"문제는… 고아원이 폐쇄되면서 공식적인 기록도 다 사라졌다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찾죠?"

서진은 답답한 듯 물었다.
서류가 없는 이상, 단서를 찾을 방법이 없다는 뜻 아닌가?

그때, 윤우가 노트북을 펼쳤다.
"공식 기록은 사라졌어도, 사람들의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겠죠."

그는 몇 번의 검색을 한 뒤, 화면을 돌려 보여줬다.

1993년 성덕 고아원 – 폐쇄 당시 기사
입양 중개인 연루 가능성, 조사 진행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종결
당시 담당 형사 인터뷰: ‘고아원의 원장과 몇몇 직원들이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서진은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고아원장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윤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만약 이 사람이 입양 서류 조작에 연루되었다면,
당신의 기록도 여기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정태준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거죠."

"찾아야죠."

서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누구인지 알려면, 이 사람을 만나야 해요."


경찰서를 나서며 서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서울의 밤공기는 차가웠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하고도 뜨거웠다.

그녀는 윤우를 바라보았다.

"기자님은 이 사건을 왜 돕고 있는 거예요?"

윤우는 담배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피우진 않았다.
그는 가만히 서진을 바라봤다.

"그냥 기자로서 궁금해서?"

서진의 질문에 윤우는 가볍게 웃었다.

"그렇게만 보면 섭섭하죠."

그는 담배를 돌리듯 굴리다가, 결국 주머니에 넣었다.

"이 사건… 생각보다 깊어요.
단순히 한 명의 입양 기록 문제가 아니라,
과거 입양 시스템 자체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고요."

서진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윤우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이걸 끝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솔직히 좀 걱정되긴 합니다."

서진은 그의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녀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진실이든… 받아들일 수 있어요."

윤우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을 보고, 더 이상 말리지 않기로 한 듯했다.

"좋아요.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봅시다."

서울, 한 오래된 건물 앞

서진과 윤우는 오래된 작은 가게 앞에서 멈췄다.
윤우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성덕 고아원의 직원 중 한 명이 이곳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여기 맞나요?"

서진은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낡고 바랜 간판이 희미하게 빛났다.

윤우는 문을 바라보았다.
"네. 이 안에 들어가면… 뭔가 나오겠죠."

서진은 긴장된 숨을 들이마셨다.
진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과거를 아는 사람이,
바로 이곳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문을 밀었다.

"어서 오세요."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은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중년의 여성.
그리고, 그녀는 서진을 보고 순간적으로 동작을 멈췄다.

마치… 그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아니,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오른 사람의 표정이었다.

"어서 오세요."

그러나 그녀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계속 서진의 얼굴을 훑었다.
마치 ‘이럴 리가 없어’라고 속으로 되뇌고 있는 듯했다.

서진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조미정 씨 맞으시죠?"

옆에서 윤우가 차분하게 말했다.
여성은 순간 움찔했다.

"… 누구시죠?"

서진은 침을 삼켰다.
이 여자는 자신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단순한 착각일까?

"전 한서진입니다."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그리고, 1993년 성덕 고아원에 있었을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순간, 조미정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뭐라고…?"

그녀의 손이 가느다랗게 떨리는 게 보였다.

"제가 거기에 있었다고요?"

서진이 다시 묻자, 조미정은 재빨리 눈을 돌렸다.
"그런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데요."

거짓말이었다.

서진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녀는 뭔가를 숨기고 있었다.


---




"제발요.
1993년에 성덕 고아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계시죠?"

서진은 조미정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난… 몰라요."

"거짓말이에요."

윤우가 조용히 말했다.
"방금 전, 한서진 씨를 보고 놀라셨잖아요."

조미정은 차가운 커피 잔을 손끝으로 꽉 쥐었다.
"그건 그냥… 옛날 기억이 떠올라서 그랬어요.
하지만 당신이 누구인지 난 몰라요."

서진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럼, 김지윤이라는 이름은요?"

조미정이 또다시 멈칫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녀는 부정했다.
"그런 이름도 기억 안 나요."

그녀의 거짓말은 서진에게 칼날처럼 날카롭게 꽂혔다.

"정말요?"

서진은 차갑게 웃으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럼…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시겠네요?"

조미정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눈을 피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나가주세요."

그녀는 너무도 단호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서진은 허탈한 듯 숨을 내쉬었다.

"… 역시 쉽게 말해주진 않네요."

윤우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짓말이라는 거, 확신하죠?"

"당연하죠."

서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아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분명히, 아주 분명히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왜 거짓말을 하는 걸까?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부정하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윤우는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기자 수첩을 꺼냈다.

"이렇게 된 이상, 조미정을 계속 압박할 수도 있지만…
대신 우회해서 접근해 보죠."

"어떻게요?"

"그녀의 과거를 조사하는 거예요.
그녀가 왜 성덕 고아원을 떠났는지,
그리고 그녀가 숨기고 싶은 게 뭔지를 찾아내면,
그녀도 결국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겠죠."

서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고아원이 폐쇄될 당시, 뭔가 남아 있는 게 있을까요?"

윤우는 휴대폰을 열어 뭔가를 검색했다.

그리고, 몇 분 후.

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을 서진에게 내밀었다.

"조미정 씨, 2002년에 성덕 고아원이 폐쇄될 당시 마지막으로 신고한 사람이에요."

서진의 눈이 커졌다.

"뭐라고요?"

"그리고… 폐쇄된 이후에도 몇 년 동안,
그녀는 계속 고아원 주변을 맴돌았던 기록이 있어요.
마치,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서진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럼… 그녀가 폐쇄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네요."

윤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욱이 말하지 않으려는 걸지도요."

서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조미정.

그녀는 단순히 성덕 고아원의 직원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 모든 사건의 진실을 아는 사람일지도 몰랐다.


---

서진은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윤우가 보낸 파일을 다시 살펴봤다.

1993년 – 성덕 고아원에서 실종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고아원의 기록에서도 삭제되었다.

서진은 마우스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혹시…"

그녀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 아이가… 나일 수도 있는 걸까?"

그녀는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잊힌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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