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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떠나는 사람, 남겨진 마음

by 아이린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을 예약해둔 시간은 이틀 뒤였다.
서울의 봄은 갑자기 따뜻해졌고,
창문을 열어두면 분홍빛 꽃가루가 커튼 끝에 달라붙곤 했다.

서진은 천천히 캐리어에 짐을 넣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촬영이 끝난 지 사흘.
그사이 그녀는 조용히 사람들을 만났고,
어머니와도 두 번 더 식사를 했다.

그녀는 여전히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어머니도 끝까지 ‘딸아’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그것이 두 사람의 방식이었다.
애써 붙잡지도,
억지로 끌어안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거리감 안에는
말 없는 동의와 조심스러운 유대감이 있었다.

“그렇게라도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려 해요.”

전날 밤, 서진이 윤우에게 보낸 메시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이틀 전 다큐 종방 회식을 끝낸 뒤,
윤우는 서진에게 다시 만날 수 있냐고 물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 카페 주소를 보냈다.

오늘, 윤우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서진은 회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커다란 스카프를 목에 두른 채 나타났다.

“곧 가요?”
윤우가 물었다.

“모레 비행기에요.
오늘은 인사하려고요.”

그녀는 자연스럽게 앉았다.
테이블 위엔 따뜻한 커피가 두 잔.
예전처럼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편한 것도 아니었다.
둘 사이엔 여전히 조용한 긴장이 있었다.
사이가 깊어질수록 조심스러워지는 감정처럼.

“다큐, 나중에 방영되면 꼭 볼게요.”
서진이 말했다.

“당신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마냥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윤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필요한 일이기도 해요.”

서진은 고개를 들었다.
눈빛이 단단했다.

“저처럼,
이름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 말에 윤우는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정말로 달라져 있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대신 들려주기 위해
이제는 자신의 삶까지 꺼내놓을 수 있는 사람으로.


공항 리무진 안에서,
서진은 핸드폰 사진첩을 넘기고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은 단 두 장.
둘 다 카메라를 보지 않았고,
표정도 어색했다.

하지만 그 사진을 볼 때마다
서진은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그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 있고,
가끔 그녀를 생각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비행기 탑승 전, 윤우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당신이 떠나도,
기록은 여기에 남아요.
그리고 그 기록은 누군가의 희망이 될 거예요.”

서진은 한참을 그 메시지를 바라보다가,
아무 말 없이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이름 없이 시작되었던 여정이,
이제는 의미로 남게 된 순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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