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면역력
현관문 댐퍼가 고장 나 인테리어 사장님께 수리를 부탁드렸다.
갓 돌이 지난 아이가 있는 사장님과 이래저래 육아 이야기를 하다가
뭔가 고민이 있으신 듯
"사모님은 산후 우울증이 없으신 거 같아요"
라는 말에
"에이 사장님, 왜 없어요~ 나도 있어요
산후 우울증 없는 사람은 없어요"
라고 바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마음이 쉬이 지치고 있는 요즘인데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리 보이지 않아서 다행인 건가 싶었다.
아이를 낳은 지 반년은 훌쩍 넘었으니 육아우울증이려나
일단, 우울증은 말하기엔 조심스러운 단어니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우울감이라고 하자.
날도 더워지니 놀이터에 나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가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혼자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문다.
머리로 애써 덮어두었던 서운한 감정들이 폭발하기도 한다.
조금만 고민하면 답이 나왔던 문제들도
어느샌가 머릿속에서 절망적인 미래로 만들어 울컥하고 있다.
이건 우울감이 맞다.
삐뽀삐뽀
경보를 울려!
빠르게 문제를 파악하고 대안을 찾아!
이러다가 다 힘들어져!!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자.
나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마주하고 당황하는 게 가장 힘들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항상 다가올 문제를 미리 생각해 보고 해결방법을 시뮬레이션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사실 임신할 때부터 걱정해 왔던 상황이다.
그리고 첫째 때 해봤으니까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
라고 생각하는 게 첫 번째다.
체력에서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공간의 여유가 없으면 마음이 숨을 쉴 수 없다.
숨이 턱턱 막히면 답답할 수밖에 없다.
체력이 힘들고 마음이 답답해져 버리면
이상하게도 마음을 더 쥐어짜서 공간은 더 없어져버린다.
그러니까 비루한 체력이나마 만들어내자.
건강이를 재우고 낮잠을 잤다.
커피로 배를 채우고 미디어로 억지로 잠을 깨우던 날들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래봤자 빨래를 조금 더 일찍 개킬 뿐인데.
대신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건강이가 깔깔 거리며 웃을 때,
나도 같이 낄낄 거렸다.
당연히 기분이 포근해졌다.
그리고 내 점심을 배달시켰다.
일부러 그동안 먹고 싶은데도 혼자서는 비싸다며 사 먹지 않았던
포케도 시켜 먹고 스타벅스 커피와 샌드위치를 시켜 혼자 브런치놀이도 했다.
나를 초대하고 대접하는 느낌이었다.
이 정도는 먹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토닥거렸다.
역시 사람은 맛있는 걸 먹으면 위로가 된다.
이렇게 약간의 소비로 얻은 도파민으로
아이와 놀이터에서 조금은 더 뛰어놀았다.
남편이 회식하는 날엔
나도 아이와 맛있는 걸 시켜 먹는다.
그리고 한참 저녁을 준비하고 정리하던 분주한 시간대신 아이와 보드게임을 한 번이라도 한다.
나도 재미있고 아이도 재미있는 보드게임을 한다.
이제야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다.
이게 사람 사는 거지.
상황에서 생긴 우울감은
그 빌어먹을 상황이 바뀌지 않는 이상 사라지진 않는다.
바이러스처럼 몸속에 잠복해 있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를 가두는 날이 오면 또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그러니 나를 챙기고 즐거운 시간이 즐거운 줄 알면서
마음이 숨을 쉬며 우울면역력을 키워야 한다.
무작정 빵집에 들어가 먹고 싶었던 샌드위치를 샀던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예전에 유행하던 게 생각나서
유치원에 다녀온 딸에게 문득 물었다.
"엄마 우울해서 빵 샀어"
한참 내 눈을 보던 딸이 눈동자가 흔들리면서 이야기한다.
"어? 내 거도 있어? "
'얘 F인 줄 알았는데, 완전 T잖아'라고 생각하던 찰나에
딸이 와락 와서 안긴다
"엄마 사랑해, 많이 사랑해"
이건 뭐지?? 뭘까??
F의 대답을 해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 T였나
혼란스러우니
다음엔 다른 걸로 물어봐야지
..
라고 생각하는 걸 보니
나 사람 사는 것 같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