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iris8679

식은커피

by 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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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잠이 든 니모를 등지고 살금살금 문을 닫아 방을 빠져나온다.
주방에 들어서 전기포트에 물을 붓고 끓이는 동안, 커피콩을 드르륵드르륵 갈아낸다.
'삐~'소리와 함께 적정 온도에 끓여진 물을 제일 좋아하는 머그잔에 따라낸다. 금세 뜨끈해진 머그잔 위로 에어로 프레스 (가압식 커피 추출기)를 올려 갈아진 원두를 탈탈 털고는 뜨거운 물을 부어 천천히 한번, 두 번, 세 번 젓는다. 뜨거운 물은 원두가루와 섞여 꿀,꽃, 초콜릿 같은 달콤한 향들을 피워올리는데 잔잔하게 퍼지는, 보이지 않는 이 온갖 기운을 힘껏 코로 마시며 주문을 건다.


' 커피야, 나에게 힘을 주련, 오늘 하루도 잘 부탁해.'


주방에서 할 수 있는, 오로지 나를 위한 신성한 의식이라 할 수 있겠다.
조용히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 커피 한 모금 입에 갖다 대는 순간, '아 제발 환청이었으면' 하는 소리가 멀리서 귀에 꽂힌다.
'잉~엄. 마.~!!!!'
'... ...'
자신의 부름에 아무도 응하는 이가 없자, 니모는 더 강렬히 엄마를 찾는다. 그제서야 놀란 심장이 벌떡 일어선다. 이번에는 커피를 등진 채 헐레벌떡 아이에게 달려간다. 니모의 짜증과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 달래다 이내 나도 짜증과 화를 아이에게 뿜고는 속으로 투덜거린다.

' 이것아. 나 아직 커피 못 마셨단 말이야.''

주방에 다시 들어서 니모를 위한 아침을 만든다.
그리고는 또다시 식탁에 돌아와 동그랗게 입을 벌리고 있는 아기곰에게 먹이를 대령하고 커피를 이어 마신다. 커피는 한참 전에 식어있다.
이런 날들의 숱한 반복 덕분에 이제 나는 식은 커피를 즐긴다.
오로지 나를 위해 정성스레 만든 커피 한 잔이 없어지는 게 아쉬워,다 마셔버리면 그 정성스러움마저 식을까봐 오전 내내 커피를 붙들고 있다.
한 모금씩 ,최대한 느리게.천. 천. 히.
집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하게 무언가를 '천천히' 하는 몸짓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런 내막을 알 리가 없는 그이는 종종 주말이 되면 식은 커피를 치워버린다.

' 여보!! 내 커피는?'
' 응? 다 마신 거 아니었어? 한 모금 밖에 안 남아 있던데?'

아. 어리석도다. 누누이 당부했거늘, 주말만 되면 내 식은 커피는 종종 그이의 손에 의해 싱크대 배수구 통으로 참사를 당한다.그 한 모금은, 몸과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데에 이로운 힘이 적어도 한 시간은 남아 있다는 것을. 그이는 여전히 모른다.
그러니 여보, 앞으로는 부디 내 식은 커피 버리지 마세요.

_ '왜 나는 커피를 오전 내내 붙들고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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