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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ris Seok Jan 08. 2021

지친 하루의 끝에 목욕

목욕 예찬

나는 조금 많이 목욕에 진심인 편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목욕이 좋았다. 추운게 유난히도 싫었던 나에게 목욕은 몸에 온기를 더해주는 일이었다. 매주 금요일 또는 토요일 밤이면 엄마, 아빠를 따라 목욕탕을 향했다. 골프연습장 지하 1층에 있는 목욕탕이었는데, 아빠가 골프 연습을 하는 동안 엄마와 나는 목욕을 했다. 따듯한 물 안에서 엄마와 나란히 앉아 그간 내게 일어났던 사소한 일들에 대해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엄마는 대개 웃음을 띤 목소리로 '그랬어'하며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어줬다.


그게 좋았다.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자연인으로 돌아온 상태에서 내 안에 쌓였던 모든 긴장감을 내려놓고 엄마와 대화하는 시간. 온탕 속 모녀 간의 대화는 평소의 나보다 그리고 평소의 엄마보다 적어도 2%는 서로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중학생 때까지는 찜질방의 시기였다. 되돌아보면 그 시기는 찜질방이 부흥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동네에 우후죽순 대형 찜질방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우리 시험이 끝나면 찜질방에 가자'와 같은 약속을 주기적으로 했던 것을 보면 찜질방은 나와 친구들에게 놀이동산 수준 쯤은 되는 재미있는 곳이었던 것 같다.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끝나고 무한한 자유가 주어졌을 때 친구들과 만화책을 잔뜩 빌려 찜질방을 향했다.굳이 찜질방에 가서 만화책을 읽는 호사를 누렸던 이유의 8할은 그곳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 때문이기도 했다. 찜질방에서 먹는 식혜와 맥반석 계란은 어찌나 맛이 있던지 지금도 그 맛이 그리워 종종 밥솥을 이용해 구운계란을 만들어 보곤 하는데, 그때의 맛이 재현되지는 않았다.



친구와 뜨끈한 방 안에 드러누워 순정만화를 읽으며 킥킥대거나 잠 들어 있던 아주머니들의 눈치를 보며 속닥속닥 비밀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즐길 만큼 즐긴 후 목욕탕 안에서 서로의 몸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목욕탕을 함께 다니는 '찐베프' 세계로 넘어갔던 기억. 큼지막한 냉탕에서 수영장에 온 것마냥 첨벙첨벙 헤엄쳤던 민폐를 저지르기도 했던 기억. 그런 기억들이 찜질방이라는 공간을 떠올리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거품처럼 올라온다.



목욕탕, 찜질방 등 공동으로 목욕을 하는 장소도 좋았지만 집 화장실의 조그만한 욕조에 물을 받아 홀로 즐기는 목욕 또한 좋다. 중학생 사춘기 소녀는 잠들기 아쉽던 새벽시간이면 조용히 욕조에 뜨거운 물을 틀었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시간 혼자 화장실에 들어가 책을 읽으며 공상하는 시간은 나를 다른 세계로 데려다줬다.


뜨끈한 물에 들어가 한점의 걱정없이 풀어헤치는 정신과 육신. 현실로부터 달아나 나만의 공간에 고립된 듯한 감각. 물 안에 몸을 담그고 있는 그 시간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나를 위한 선물과 같은 시간이었다. 특히 누군가에게 상처받거나 하기 싫은 과제들이 주어져 막막한 감정이 들 때면 목욕은 더할나위 없는 치유제이자 휴식처가 되어주었다. 


코로나19로 하루종일 집 안에 갇혀 육아와 재택근무를 병행해야 하는 오늘날에도 목욕은 여전히 내게 최고의 힐링을 선사해주고 있다. 아이들이 잠들기만을 기다린다. 목욕을 하기 위해. (운이 좋다면)오후 9시쯤 아이들이 잠들고 집에 고요가 찾아온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 목욕탕 욕조에 물을 받는 일. 스스로에게 주는 가장 달콤한 보상이다.

특히 요즘에는 배쓰밤에 푹 빠져있다. 집 앞 쇼핑몰의 러쉬에 아이쇼핑 하는 재미에 빠진 이후부터다. 단란한 요즘의 일상에 찬란한 색으록 가득한 러쉬의 배쓰밤을 구경하고 구입하며 내 일상에 색깔을 더했다. 말장난같지만 정말 그렇다. 러쉬의 오색찬란한 배쓰밤들은 요즘의 나를 위로했고, 북돋아줬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색상의 물 안에 들어가 하루동안 고생한 내 몸을 부드럽게 쓰담쓰담 해주는 일이 참 좋다.


물론 러쉬 배쓰밤은 비싸다는 가장 큰 단점을 가지고 있다. 미국 가격 기준 보통 6달러~10달러 사이인데, 목욕을 한 번 할 때마다 1만원씩 쓰는 셈이니 어떻게 보면 집에서도 목욕탕 입장료를 내는 것 만큼의 가격을 지불하는 셈이다. 그래서 잘 쪼개지는 배쓰밤의 경우에는 2-3등분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일부 배쓰밤은 한 차례 녹인 다음 상온에서 보관했다가 다음 날에 쓰기도 한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한번에 배스밤을 욕조 안에 넣어 휘리릭 녹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목요의 하이라이트이긴 하다.


또 하나의 단점을 말하자면 목욕을 오랜 시간을 할 수 없다는 것. 나의 경우 보통 목욕을 한 번 시작하면 나를 방해하는 일과 사람만 없는 한 2시간은 기본이다. 결혼을 한 친구 한 명은 "남편이 목욕을 하러 들어가면 몇 시간이고 나오질 않는다"며 하소연을 한 적이 있는데, 난 목욕덕후 답게 친구에게 진지하게 답했다. "이해해줘야돼. 목욕은 몇 시간씩 즐기는게 제맛이거든."


하지만 러쉬 배쓰밤을 욕조에 넣으면 청결 문제로 30분 이상 목욕을 하는 게 권장되지 않는다. 실제로 배쓰밤을 녹인 물에 오래 있다보면 몸이 근질근질 하기도 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목욕을 할 수 없는데, 그럼에도 목욕을 지속하고 싶을 때는 물을 다 뺀 후 다시 물을 받는다. 무슨 물 낭비인가 싶지만, 지친 하루의 끝에 나에게 이 정도 보상은 해줘도 되잖아? 라는 보상심리가 지배적으로 작용한다.


목욕에 대한 글을 적어내려가다 보니 슬슬 또 목욕이 하고 싶어 진다. 지금 시각은 오후 6시를 향해 간다. 회사 업무는 끝냈지만, 육아가 남아있다.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기까지 아직 3시간은 더 분발해야 한다. 오늘 하루도 조금만 더 화이팅 해서 육(아)퇴(근)까지 달려나가리라. 그리고 목욕으로 하루를 마무리해야지.


(TMI지만  글을 쓰며 러쉬 배쓰밤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는 사실. 지난번 글이 '비울 수록 채워진다'였는데,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삶은 이렇게나 어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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