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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던 꿈 없더라도

조지 오웰, 『동물농장』

by 박둥둥

“먼 훗날 무지개 저 너머에 우리가 찾던 꿈 거기 없다 해도.”
성시경의 노래 가사지만, 이 한 줄만큼 혁명의 본질을 간파한 문장이 또 있을까.


그 어떤 혁명이든 결국 오염된다. 혁명이 성스러운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초침의 금빛 끝이 메시아가 들어오는 문이 되는 그 시간, 파리의 혁명가들이 가장 먼저 시계탑을 향해 돌을 던졌다는 벤야민의 기록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시간이 멈춘 그 순간이 지나면, 언제나 다시 권력이 태어나고 시스템은 재구축된다. 오웰이 『동물농장』에서 풍자한 것은 바로 그 찰나의 혁명 이후, 체제를 사유화한 독재자 스탈린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것만을 다룬 책이었다면 소련의 붕괴와 함께 이 작품 역시 잊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농장』은 여전히 위험하다. 그리고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방학 숙제로 독후감을 쓰는 학생이 아니고,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억지로 책을 붙잡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교훈은 잠시 접어두고, 이번에 다시 읽으며 새삼 떠올린 세 가지 생각을 적어본다.


첫째, 예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장면 ― 7장에서 클로버가 울며 노래 부르는 장면이야말로 이 작품의 아름다움이 응축된 순간이라는 깨달음이다. 필연적이겠지만, 번역가의 필력이 가장 크게 갈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러 판본을 비교하며 세 가지 번역을 따로 읽어보았다.


둘째, 오웰이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는 대상은 누구인가. 물론 메인 빌런은 나폴레옹이다. 스탈린을 돼지로 변모시킨 오웰의 냉혹한 필치는 지금 읽어도 통렬하다. 그러나 진정 비판의 칼끝이 향하는 존재는 복서다. “더 열심히 일하겠다”는 그의 신념은 탐욕보다 더 무서운 무기였다. 카프카라면 복서를 훨씬 더 비참하게 죽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옳다고 믿는 신념이야말로 가장 비극적인 독재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오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셋째, 판본에 대한 짧은 감상. 열린책들 판본에는 초판 서문과 우크라이나판 서문이 실려 있어 흥미로웠지만, 민음사판은 마지막에 오웰의 명문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를 덧붙였다. 이 글은 말 그대로 핵폭탄급이었다. 지금까지 읽은 오웰의 문장 중 가장 뛰어난 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물농장』 자체보다 이 에세이를 읽기 위해서라도 민음사판을 집어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작가가 된 이유를 네 가지로 밝히는 오웰의 진솔한 고백 속에서, 나는 그의 어두운 그림자 ― 오웰리스트들의 그림자 ― 까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글을 쓴 이유 네 가지 중, 언젠가부터 첫 번째가 네 번째를 넘어선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의 의미는 직접 읽어보면 알 수 있다. 두 번 읽고, 필사까지 해두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오웰의 시선은 시대가 흐르며 한계도 드러냈다. 그는 혁명 그 자체를 회의적으로 바라봤고, 그 회의는 오래도록 유효했지만 결국 낡은 오웰리즘으로만 남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꿈을 꾸려는 노력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 찾던 꿈이 없더라도, 꿈꾸는 일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다시 지난 시대의 가축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클로버의 눈물이 던지는 울림은 그래서 오늘날 더 크게 다가온다. 돼지와 인간의 구분이 흐려진 시대, 혁명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꿈꾸는 일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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