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훈련 프로그램과 경제학 효용 그래프의 상관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학구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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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지만 대학교 신입생 시절 학교 근처 복사집에서 봤던 전공 교재 복사제본 해적판에 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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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의 방 안 책장에 <태백산맥>과 <토지> 전집이 있다는 것이 은근 자랑스러웠던 입학생에게, 마음만 먹으면 조정래 작가나 박경리 작가의 책도 복사본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솔직히 충격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교재를 새 책 구입하였지만 오리엔테이션 같은 조 선배동기들을 따라갔다가 나 역시 얼떨결에 복사본 교재를 하나 구입하였다. <맨큐의 경제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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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기가 시작되고 2주 정도 지났을 때, 나는 결국 교보문고로 달려가 보라색과 황금색 표지가 무척 촌스러웠던 <맨큐의 경제학> 새 책을 구입하였다. 앞서 2주 동안 복사본에 필기한 내용들을 새 책에 옮겨 적었다. 갑자기 새 책을 사러 갔었던 이유는 무척 간단했다. 그 시절 나의 고급스러운 언어로 빌려 쓰자면 ‘너무 쪽팔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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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돈을 들여 교재를 모두 구입하는 친구들이 다수였지만, 복사본 책을 구하는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교재비를 감당할 수 있는 집안 형편의 문제가 아니었다. 부잣집 아이가 복사본을 구입하는가 하면, 형편이 안 좋아도 공부책은 꼭 새 책을 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복사본을 구입하는 친구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공부를 잘하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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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할 만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적당한 수준이 한계였다. 당연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하고 싶긴 한데 그 돈 들일 마음은 없다는 마음가짐은 출발선부터 뒤로 밀려나 있다. 뭔가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친 이에게는 자신이 감당 못할 수준이 아니라면 비용이 중요하지 않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에 해당되는지가 훨씬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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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그 시절 <맨큐의 경제학>이 생각났던 것은 요즘 운동 프로그램에 지적재산권이 언급되기 시작되어서다. 처음에는 다른 팀 코치, 감독들이 프로그램을 따라 한다는 문제인 줄 알았다. 음, 그렇단 말이지. 그래 그러면 안 되지만, 그래도 그렇게 따라 하는 코치들의 마음이 뭔지는 알 것 같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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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그런 문제뿐만 아니라 수강생들의 해적질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한 명 또는 소수만이 등록하고 결제해서 여럿이 공유한다는 것이다. 신입생 때 봤던 왕십리 복사집들보다 이번엔 더 큰 충격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학생이라는 명분과 핑계가 있었다. 돈이 없으니까 그리고 돈이 없어도 졸업은 해야 하니까 그것은 의무 같은 것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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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으로서의 공부가 아니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운동 취미생활에서 해적판을 여럿이 ’함께‘ 공모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문득 궁금하였다. 제 앞가림 다하는 어른들이 서로 ‘아싸! 바로 이 맛이지!‘ 이러면서 기쁨과 희열을 느끼는 모습이 솔직히 너무 쪽팔리지 않은가. 내가 이런 사람이랑 함께 기쁨을 나눈다는 것도 너무 지질하고, 이런 사람이랑 똑같이 함께 어울린다는 그 자체가 내 삶의 오점 같은 것 아닌가. 하긴 그런 생각 자체가 없으니 ‘함께‘ 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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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질을 하는 카피캣의 생각과 의식은 다음과 같다. 자기 자신이 치밀하고 영리하다는 생각을 가진다. 심지어 제 돈 주고 구입하는 남들이 약간 어리석게도 보인다. 아니, 이렇게 멋진 방법과 마음 맞는 사람들이 있었다니! 그 자체가 성취의 기쁨이자 희열이고 행복이다. 행복감, 자아도취와 함께 도파민이 분출된다. 중독된다. 습관이 된다. 단어 뜻 그대로 도벽은 습관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가까이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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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이 습관을 만들기 때문에 부족할 것 없이 넉넉한 사람도 한번 하게 되면 계속하게 된다. 불로소득 같은 착각은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아무리 돈 많고 권력이 있고 정보를 많이 알고 여러모로 소위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결국 나에게는 해악이 된다. 사실 그런 사람이 이런 나쁜 생각 나쁜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할수록 더 위험하다. 정말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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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벽이 아니라 해당 코치나 클럽/팀이 미워서 그럴 수도 있다. 이건 도벽보다 더 좋지 않다. 마음속 미움과 시기심이 가득하고 그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결국 나에게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미워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은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상대 안 하고 피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보통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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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 때 봤던 복사집과 해적판들은 휴학 이후 복학생 시절에는 모두 사라졌었다. 시대가 바뀌었던 것이다. 코치와 감독의 노고가 녹아들어 간 운동 프로그램에 대한 해적질도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 아니, 애초부터 생겨서는 안 될 것이었다. 이미 시대가 그런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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