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프로그램은 좋은 책과 같다

장거리와 그다음 날

by 아이언파파

2023.08.20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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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은 자꾸만 다시 보게 된다. 읽고 또 읽어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즐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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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책은 주로 도서관에서 특별히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다 즐겨보는 편이나, 좋은 책은 아이가 꼭 다시 한번 읽고 빌리고 또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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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그림책 그 자체를 즐길 뿐 아니라, ‘책 읽는 법’도 배운다. 그림에 익숙해지고 글자를 익힌다.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되고 흘러가는지, 어디까지 가야 결말을 짐작할 수 있는지, 그 짐작이 맞아떨어지거나 빗나갈 때 마음속 얼마나 큰 즐거움과 놀라움이 생겨나는지를 익힌다. 마지막 장면을 보고, 마음에 어떤 물결이 지나갔는지 깨닫기도 한다. 독자로서 첫걸음을 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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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그림책은 독자를 그저 애 취급한다. 독자가 아이라는 이유로 단조롭고 맥락 없이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로 장면들을 채운다. 어쩌다 흥미를 느낄 수는 있지만, 아이는 다시 보지 않는다. 좋은 그림책은 새롭고 즐거운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책임감을 가지고 독자를 인솔한다. 애를 애 취급하지 않는다. 이런 책은 읽고 또 읽어도 지루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진다. 훈련이 거듭될수록 책을 더 잘 읽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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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300m 프로그램이 그렇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거리를 반복 질주하기 때문에, 힘들어서 실패할까 봐 두렵지도 않으면서 충분한 거리를 질주하기 때문에 실력은 향상된다. 300m 질주와 100m 불완전 회복으로 구성되어 정규트랙 1 레인 400m에서 실행하기 좋다. 질주 속도와 불완전 회복 시간, 그리고 세트 수를 변주하여 다양한 프로그램 구성이 가능하다. 할 때마다 새롭다. 좋은 책과 같은 좋은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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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 마라톤을 준비하며 겨울 첫 LSD(Long Slow Distance, 긴 거리를 천천히 달리는 훈련)를 하던 때, 나는 LSD를 몸과 마음의 축제와 같다고 하였다. 부담 없이 느린 속도로 거리를 채워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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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 가을 마라톤을 대비한 어제 토요일 첫 LSD는 꽤나 힘들었다. 여전히 무덥고 습한 여름 공기의 질감이 달리는 거리가 누적되고 해가 떠오를수록 더욱 뜨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부담스러운 속도 페이스가 아니라서 그만둘 정도는 아니었지만, 아마 지금껏 했던 LSD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날 중 하나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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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LSD를 마치고 오늘 일요일, 좋은 책과 같은 300m 프로그램을 다시 꺼내 들었다. 코치님의 추천 구성에 따라 달리고 회복하고 달리고 휴식하고 또 달렸다. 역시 좋은 프로그램다웠다. 마치고 나니 어제의 힘든 느낌은 온 데 간 데 없고 기분 좋은 성취감의 여운이 깊게 남았다. 오늘 트랙에는 배문고 육상 선수들도 연습하여 멋지게 달리는 모습들을 실컷 구경하였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복귀 후, 오후 시간에는 효창운동장 근처 용산 꿈나무종합타운에서 아이가 읽을 책들을 빌려왔다. 좋은 운동과 좋은 책이 함께 했던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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