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레이스 하프마라톤 1:21:01
10월의 서울레이스(서울달리기) 하프마라톤은 작년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회 중 하나이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3종이나 마라톤 모두 많은 대회를 나가지 않고 적당히 필요한 대회만 참가하는 내 입장에서 1년 중 유일한 하프마라톤이라 마음껏 하프 개인기록 도전 할 수 있는 대회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작년부터 서울 도심 한복판을 통제하고 달리는 코스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 서울달리기 하프 코스는 지금과 동일하게 시청에서 출발했지만 곧장 청계천길을 지나 한강공원 산책로를 달린 다음 뚝섬한강공원으로 피니쉬 하는 밋밋한 코스였다. 지난 대회부터 광화문 일대와 삼청동, 청와대, 숭례문, 종로, 청계천로 등 도심 한복판을 달리는 멋진 코스로 바뀌었다. 작년 대회에서 기분 좋고 신나게 달린 덕분에 당시 1시간 19분대의 하프 개인 기록을 달성하며 피니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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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목표는 호기롭게 1시간 17분대 목표였다. 작년보다 풀코스 목표 기록과 훈련 그룹 수준이 향상되었고, 스피드도 올라와 있었다. 무엇보다 JTBC 마라톤 풀코스 239(2시간 40분 이내) 목표 그룹 훈련을 별 탈 없이 잘 소화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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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상태가 좋지는 않았다. 추석 연휴 직전 장염에 이어 연휴 이후에도 회복이 더디더니 수요일부터 지독한 감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코가 막히고 줄줄 흘러내리고 목이 붓고 기침과 가래가 계속되었다. 그냥 봤을 때에는 유치원에서 걸려온 아이에게 옮은 감기였지만 아이언맨 구례 대회 직전직후부터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가 지속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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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대회 당일처럼 출발 3시간 30분 전인 4시 30분에 일어나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해야 하는데 오한과 발열감이 조금 있어 고민되었다. 어차피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도 대회를 안 나갈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전의 대회 루틴 그대로 그냥 샤워를 했다. 샤워, 화장실, 그리고 전날 미리 준비해 둔 대회 복장 착용
골반, 고관절 가동성 확보를 위해 힙모빌리티를 하고, 코어를 위해 근력밸런스 1세트, 한발 브릿지, 힙업 등 간단한 보강을 하였다. 2주 전 일시적이긴 했지만 허리 통증을 경험했기에 최근 거의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하는 동작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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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장에는 여유 있게 출발 2시간 전 도착하는 것이 좋지만 오늘 대회는 아주 비중 있는(?) 대회는 아닌 만큼 지하철을 타고 1시간 30분 이전인 6시 30분쯤 시청역에 도착하였다. 탈의실에서 겉옷을 탈의하고 대회 복장 위에 보온을 위해 우비를 걸쳤다. 여전히 오한과 발열감이 있고 코가 막히고 목이 부어 목소리가 맹맹했다. 몸 상태로 인한 경기력 저하가 우려되어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엠플 철분제와 액상 마그네슘을 하나씩 먹었다. 안타깝게도 이런 것들까지 챙겨 먹었지만 결과적으로 목표했던 레이스를 펼칠 수는 없었다. 몸이 받쳐주지 못하니 백약이 무효했다
웜업 후 한번 더 화장실을 가기 위해 프레스센터 지하에 먼저 내려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다. 하프 탈의실 쪽 화장실로 이동했지만 역시나 긴 줄이 이어져 있었다. 이번에는 더 멀리 광화문역 지하철 화장실로 내랴갔는데 여기도 사람이 많았다. 하는 수 없이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8시 정각 출발인데 7시 49분이 되어서야 화장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헐레벌떡 서둘러 일을 마치고 나와 스타트 라인으로 뛰어오니 이미 출발인원이 꽉 차 대기 중이었다. 기록을 위해서는 무조건 최대한 앞줄에서 출발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귀빈 단상 옆 빈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진행을 맡은 경호 요원들이 막아선다. 일단은 들어가야 할 것 같아 말대꾸하지 않고 밀치고 들어가려 했는데 강하게 막는다. 어이쿠 안 되겠다. 약간 뒤쪽으로 돌아가 대기 중인 선수 분들에게 죄송하다 양해를 구하며 조금씩 앞으로 앞으로 이동하였다. 겨우 맨 앞에서 5~6번째 줄에 설 수 있었다. 앞 줄에 함프로님을 비롯해 함께 운동했던 분들이 주변에 보였다. 인사를 나누고, 우비를 벗어두고, 준비, 그리고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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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5~6번째 줄이지만 출발 직후에는 페이스 조절 없이 전력으로 뛰쳐나가는 초보자 분들도 뒤섞여 엄청난 인파가 가로막았다. 프레스센터 출발부터 광화문, 삼청동 입구까지 사람들에게 막혀 제대로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이때부터 조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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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동에서 청와대로 올라가는 첫 오르막은 작년과 달리 처음부터 매우 힘든 느낌이었다. “자! 가자!”하는 기분으로 신나게 3분 40초대 페이스로 달려 올라갔던 작년과 달리 이번에는 4분 10초대까지 느려지기도 했다. 언덕 정상으로 올라와 이후 이어지는 내리막에서 최대한 빨리 회복하여 페이스를 올리고자 하였다. 다시 광화문으로 돌아내려 오기까지 3분 25초~3분 35초 페이스로 초반 손실을 만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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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상태가 확실히 안 좋은지 코스 중간마다 약간의 오르막이 있어도 작년과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세종대로에서 숭례문으로 가는 미세한 오르막에도 페이스 변화의 편차가 커졌고, 거의 평지에 가까운 종로 을지로 코스에서도 아주 조금의 경사만 나타나도 그것이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와 이거 오늘 어렵겠는데, 생각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8k 지점쯤에서 사진 찍으며 응원하는 로코치님과 사진사 멸치님을 마주쳤는데, 내 상태가 안 좋은 것이 눈에 띄었는지 로코치님이 킥킥 웃으시면서 “힘내봐!” 한다. 흐흐흐, 역시 내가 아무리 웃으며 지나가도 경보 한국 신기록을 세우셨던 선수 분 눈에는 모든 것이 다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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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k 지점에서는 오늘 내 몸 상태가 내가 원하는 바를 못 받쳐준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며 어떻게든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여보고자 발버둥 쳤던 구간이다. 좀처럼 3분 50초대 이내 페이스로 올라오지 않았다. 작년에는 아깝게 1시간 18분대를 놓친 19분대 기록이었는데, 이대로 가면 1시간 20분을 넘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와, 정말 그건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점점 현실로 다가오니 굉장히 불안하고 초조했다. 다른 분들 또는 몇몇 그룹에서 케이던스를 맞춰 달리면 3분 45초~50초 페이스가 겨우 나오고, 낙오되어 나 혼자 달리게 되는 순간에는 4분대 페이스까지 느려지는 현상이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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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k를 지날 때쯤 나와 비슷한 속도로 달리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러너가 서로 언제 마지막 짜내기 페이스를 올릴 것인지 대화하고 있었다. 한 명은 오늘은 영 아니라며 막판까지 똑같은 속도 유지만이라도 하는 것이 목표라 하였고, 다른 한 명은 원래는 18k쯤 생각했는데 오늘은 너무 힘든 것 같아 마지막 2km 남겨둔 19k에서 올릴 것이라고 하였다. 지금 이 순간 나도 너무 힘들기는 마찬가지인데, 19k부터는 어떻게든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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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분 전 계획했던 대로 19k부터 속도를 올렸다. 시계를 보니 오늘 1시간 20분은 어차피 넘길 것 같아 어느 순간부터 내 목표는 ‘그냥 이대로 무사히 완주만 하자!’로 바뀌어 있었다. 목표 달성 여부와 기록의 고저를 떠나 모든 대회에서 마지막 질주는 가장 중요하다. 이걸 안 하거나 못 하면 동호인으로서 운동 자존감 하락과 직결된다. 이미 내 앞에 수십 명의 선수들이 경기를 마쳤지만 마지막 피니쉬 라인이 500미터, 300미터 100미터 가까워질수록 조금 우스꽝스럽게 보일 정도로 나는 전력을 다해 뛰었다. 드디어 피니쉬. 1시간 21분 1초. 작년 동일한 코스 동일한 대회 기록보다 무려 2분 정도 느려진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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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를 마친 분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메달과 간식을 받아 옷을 갈아입으며 마무리하였다. 꾸준히 운동을 배우고 연습하며 즐겨온 나는 지금껏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계속 기록을 경신하여 왔다. 처음으로 동일한 코스에서 기록의 퇴보를 경험하였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나는 이것이 처음이라 다소 당황스럽기도 하였다. 이 또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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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대회에서 전체 우승을 차지하신 우리 코치님, 함프로님은 걱정 말고 과감하게 하던 그대로 훈련하고 11월 초 풀코스 대회까지 남은 기간 최상급 컨디션을 만들 수 있도록 해보라 하셨다. 나는 이런 쪽에서는 회복 탄력성이 좋은 편인 것 같다. 어쩌면 무수히 많은 실패에서 무뎌진 것일 수도 있다. 대회를 복기하며 글을 남기는 이 순간, 다시 긍정과 희망, 투지가 가득 해지며 다음 레이스, 내일의 훈련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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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달렸듯
내일도 달린다.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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