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마라톤 09. 레이스, 처음 경험하는 응원, 이건 말도 안 돼
출발지인 홉킨튼에서 시작하여 5km 정도까지 달릴 때 생각했다. '여기는 한적한 시골 마을 같은데 예상보다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있네.' 5km를 지나 10km 지점까지 달려가면서는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 '혹시 계속 이런 식으로 응원하는 건가?' 지금까지 봐왔던 마라톤 대회들보다 우선 갤러리 인원 수가 너무 많았다. 소리 지르고 손뼉 치는 응원 소리는 얼마나 열광적인지. 이때부터 거리 응원하는 분들, 꼬마들과 하이파이브도 하면서 조금씩 천천히 뛰었던 것 같다. 15km 지점. 여기부터는 완전 생각을 고쳐먹었다. '안 되겠다. 이런 엄청난 마라톤이라니. 이 열기 이 분위기 최대한 경험하고 간직하여 담아가야겠다.' 보급벨트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내 들고 선수들과 거리 응원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나 또한 한껏 즐기며 후미 그룹에서 출발한 일행을 기다리며 천천히 달렸다. 15km 지점까지 60분 50초. 1km당 약 4분 페이스였으니 꽤 열심히 달려온 셈이다. 날씨도 덥고 코스도 힘든데 이런 식으로 계속 달렸다간 기록도 망칠 것 같고 대회를 온전히 즐기지 못할 것 같았다. 1km 당 6분 정도로 페이스를 낮추었다. 18km 지점쯤에서 나누어주는 몰텐 Maurten 에너지 젤을 든든히 챙기고(이게 웬 떡), 웰슬리 여대 앞으로 지나갈 때는 유명한 KISS ME 응원존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며 보스턴 마라톤을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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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응원이 계속 이어진다. 오늘은 보스턴 시민들 모두 마치 마라톤에 정말 미친(?) 사람들 같았다. 두 줄 세 줄 겹겹이 에워싼 응원 인파가 스타트라인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지점에서부터 42km 내내 이어진다. 응원 열기와 함성은 얼마나 대단한지 '혹시 이 사람들 나 아는 사람인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눈이 마주치거나 카메라를 들이대면 더 열광적으로 소리 지르고 응원해서 걱정되기도 하였다. '다섯 시간 동안 이러면 다들 목은 괜찮을까? 이 분들 몸살 나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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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마라톤에서는 우리나라 대회와 달리 페이스/속도별 그룹, 흔히 말하는 '열차'를 볼 수 없었다. 비슷한 속도의 선수들이 다 같이 달려가긴 하지만 각자 따로 레이스를 즐기며 앞으로 나아간다. 보스턴 대회에서는 기록별 출발 그룹을 'WAVE'라는 이름으로 나누었는데, 말 그대로 물결 흐르듯 떠밀리듯 마라토너들이 달려 나간다. 그룹과 열차가 보이질 않아 처음에는 미국 사람들 특유의 개인주의 때문인가 생각했는데 그런 이유가 아니라 굳이 그룹을 이뤄 달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진 응원인파 가득한 코스를 달리면 자연스럽게 경기에 몰입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경험했던 마라톤 대회에서는 휑한 코스를 달리다 보면 페이스 감각에 집중하기 힘들고 정신적 고통 한계의 임계점이 이른 시간 다가올 수 있어 함께 달릴 동료나 그룹이 필요한데, 여기서는 그럴 일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많은 사람과 함께 이 순간 몰입하여 달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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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트 브레이크 힐 Heart Break Hill. 그 옛날 추월 당한 존 켈리 선수의 마음이 찢어졌던 장소이기도 하고 수많은 마라토너들의 마음을 부숴버리는 악명 높은 오르막길. 다른 분들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는 별 것 아닌 오르막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막상 뛰어 올라가 보니 무척 힘든 구간이었다. 이미 느린 속도로 뛰고 있었지만 더 느린 속도로 걷는 듯 뛰는 듯 올라갔다. 33km 지점을 지나서 드디어 후미에서 출발한 같은 팀 일행 분들과 만나 함께 달리기 시작하였다. 카메라를 들고 서로 찍어주기도 하였고 여전히 열광적인 응원에 흥분한 채 우리 모두 신나게 뛰어갔다. 응원에 취한다는 것은 말로만 들어보고 농담처럼 얘기하기만 했는데, 여기 응원은 정말 홀리고 취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일행들과 만나서 달린 마지막 10km는 마지막 피니쉬 구간을 제외하고는 사실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단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응원이 계속되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황홀한 기분마저 들었다는 것. 이런 대회 분위기 경험은 처음이라 너무 들뜬 마음에 촬영한 영상을 (달리는 도중에) 아내에게 메시지 보내고, SNS에 업로드하고, 네이버카페에도 올렸다. 이런 적은 없었다. 이런 대회도 없었다. 몸도 마음도 붕 떠서 환상적인 기분만 남아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뛰며 주변 풍경을 찍어놓지 않았으면 단 하나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할 뻔했다. 마린님의 액션캠과 내 휴대폰으로 영상을 촬영해 두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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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응원도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는데, 마지막 피니쉬 직전 Boylston 거리 응원은 더 말이 안 되었다. 나는 20대 초반 붉은 악마 영남지부 대구지회 소속이었다. 한일월드컵이 열렸고 대구 울산 그리고 광주 스타디움 응원단 속에서 직접 지켜봤다. 땅이 흔들릴 것 같은 함성과 열광이란 것을 기억하고 있는데, 그때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그때의 나는 관중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선수이니까. 나를 비롯한 마라톤 참가 선수 한 명 한 명 모두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내 인생 최고의 응원이었다. 이 응원을 잊을 수 없다. 심심하고 볼 것 없는 도시 보스턴인데, 이 응원과 열기를 느끼고 싶어 다시 한번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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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당일 응원만이 아니었다. 보스턴은 마라토너에게 따뜻한 곳이다. 대회 신청 전 호기심으로 봤던 <아메리칸 맨헌트> 다큐멘터리 시리즈에서처럼 몇 년 전 테러의 경험으로 혹시라도 낯선 이방인들을 경계하지는 않을까 했던 생각은 기우였다. 어딜 가나 마라톤 복장을 한 이들에게 선한 눈빛, 미소 그리고 따뜻한 호의가 가득했던 보스턴. 대회가 열리는 4월 보스턴만큼 러너들에게 천국 같은 곳이 있을까 생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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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쉬. 마라톤 대회를 뛰면서 빨리 끝나는 것이 아쉬웠던 적은 처음이었다. 갤러리들의 열성적인 응원이 이어지는 보일스톤 거리에서 걸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최대한 늦게 끝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함께 피니쉬 한 같은 팀 동료분들과 함께, 여전히 가시지 않은 레이스 여운에 빠져 있었다. 기록은 3시간 12분. 기록이 중요하지 않은 대회도 처음이었다. 이 기록도 대회를 마치고 한참 후에야 조회해서 확인했던 것이다. 어떤 기록으로 달렸는지 중요하지 않고 보스턴을 어떻게 느끼고 경험하여 담아왔는지가 더 중요하였다. 카메라로 거리 곳곳과 우리의 모습을 담고, 팀 동료 분들과 합류하여 멋진 기억을 남길 수 있어 그것이 가장 좋았다. 비록 전문 선수가 아니더라도 매 대회 기록과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것을 최고 미덕으로 삼으며 달려왔는데, 보스턴 마라톤은 그런 나의 취미관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마라토너는 보스턴 전후로 나누어진다고 하였다.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보스턴 마라톤 이후 나는 완전 다른 마라토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