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마라톤 11. 마무리하며
보스턴 마라톤은 운동 취미를 즐기는 마스터즈 동호인으로서 나의 정체성을 흔들 정도로 큰 경험이었다. 철인이 아닌 마라토너의 정체성이 더 강해지는 그런 경험. 유산소 지구력 운동 실력을 평가하고 경쟁하는 척도로는 3종 경기만 한 것이 없다. 마라톤 종목 또한 자세와 기술이 중요하긴 하지만 폼이 좋지 않아도 힘으로 밀어붙이고 정신력으로 고통을 견뎌내는 등 운동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좋은 성적과 기록을 달성하는 동호인들이 적지 않다. 3종 경기는 운동 기술을 습득해야 하고 운동 능력을 향상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종목을 변환하는 과정에서 신체 움직임의 궤적을 그리는 것과 동작의 원리를 몸과 마음으로 이해하고 숙지하고 있어야 원활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3종 경기에서 장거리 종목으로 거리가 길어질수록 이러한 운동 능력 차이는 큰 영향을 미친다. 막무가내는 한계가 있다. 운동 능력이 좋아야 한다. 이것이 3종 경기의 매력이다. 다만 이러한 이유로 철인 3종은 소수의 마니아적인 스포츠이다. 해외 유명 대회뿐만 아니라 철인들의 꿈의 무대라고 하는 하와이 코나 월드챔피언십이라도 메이저 마라톤과 같은 대회 문화와 분위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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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나는 <아이언맨 IRONMAN> 대회 낚시질이(?) 특기였다. 함께 운동하는 주변 사람들을 꼬드겨 더 열심히 수영 사이클 런 준비를 하고 제대로 된 대회에 나가자는 식이었다. 이제 솔직히 그러지는 못할 것 같다. 휑한 도로를 홀로 페달 돌리며 사이클을 타고 한적한 시골 마을 같은 곳에서 드문드문 위치한 갤러리들의 응원을 받으며 고독하게 달려야 하는 경기라니. 준비 과정 또한 단일 종목인 마라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과 비용의 투자 희생이 필요한데, 수십만 원 수백만 원의 참가비용을 지불하고도 그런 경험을 해야 하는 대회를 주변에 권하고 이끌게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해외 3종 대회 또한 마찬가지이다. 마라톤과 비교했을 때 커다란 사이클을 가져가면 여행과 이동에 제약이 있고, 특히 철인 대회 운영 특성상 최소 2박 3일은 제대로 관광을 못하고 대회장에 묶여 있게 된다. 특별한 목적과 열정 그리고 넉넉한 경제적 형편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여행 삼아 참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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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없이 코스를 꽉 채운 갤러리들의 응원과 함성이 출발부터 피니쉬 라인까지 계속 이어진다. 2시간 10분을 달리는 선수도 5시간을 꽉 채워 달리는 동호인도 모두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곳이 보스턴 마라톤이다. 이 경험을 한 번 맛본 이상 계속 이런 대회만을 참가하고 싶어지게 된다. 과거의 마라토너는 크고 작은 대회에 나가 기록 향상을 꿈꾸며 여름에 햇볕에 그을리고 겨울에는 흘린 땀이 얼도록 달려가며 자신과 타인과의 승부에 매진한다. 보스턴을 달린 마라토너는 승부가 아니라 경험 그 자체에 더 많은 것을 쏟아붓는다.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메이저 대회는 어디일까,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이가 들고 늙어서도 매년 이런 경험을 하며 살아가고 싶다, 그것이 인생의 목표이다.' 보스턴을 달린 마라토너는 승부욕은 줄어들고 마라톤 여행을 향한 물욕이 커진다는 것이 유일한 부작용일지도 모른다. 마라톤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보스턴을 위해 마라톤을 하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 권하는 그 순간이 바로 꼰대가 되는 경계 지점이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권유가 아니라 글과 말과 사진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들려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마라토너가 보스턴을 꼭 경험하길.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스턴을 목표로 마라톤을 시작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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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은 가끔 '마라토너는 보스턴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 말하곤 한다. 이제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나는 보스턴 마라톤 이후로 완전 다른 마라토너가 되었다. 전문 선수가 아닌 운동 취미를 즐기는 동호인으로서 어떤 종목 어떤 대회보다 압도적인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일종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 압도적인 경험과 그때의 감동, 추억이 나를 또 다른 메이저 마라톤으로 이끌고 있다. 이 운동을 한다면 꼭 한 번 보스턴 마라톤. 진짜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다면 꼭 한 번 보스턴 마라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