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도 기호식품일뿐이다.
와인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듣고 있던 사람들이 입을 벌리며 우와, 하고 감탄사부터 내뱉는다. 아무래도 우리나라에 들어온 역사가 짧다 보니 와인은 어려운 술이라는 인식이 아직도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그럴 반응을 마주할 때마다 부끄럽다. 나는 아직 와인 라벨도 잘 못 읽는데, 사람들이 와인을 알려달라고 할까 봐, 이 와인은 어떤 와인이냐고 물어볼까 봐 불안하다. 그래서 누가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 묻기 전까지는 스스로 와인을 좋아한다는 말을 절대 입 밖에 꺼내지 않는다.
나에게는 소주의 강한 알코올 냄새와 맥주의 탄산이 잘 맞지 않았다. 막걸리 같은 탁주는 한 잔만 마셔도 머리가 팅 하고 어지러워서 즐기며 마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홀짝홀짝 조금씩 마셔도 괜찮은 술을 찾다가 과실주인 와인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 와인을 구입할 때는 당최 무슨 와인을 사야 할지 몰랐다. 까만 병은 레드 와인, 초록빛이 도는 병은 화이트 와인. 이렇게만 알고 있었다. 그 정도로 ‘와알못’이었다. 처음 와인에 빠졌을 때는 편의점 와인 코너 앞에 한참을 서있는 날이 많았다. 와인 라벨에 적힌 영문 스펠링을 구글에 검색하며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편의점 알바생이 노려보지는 않았을까? 그때는 검색에만 정신이 팔려 알아보지 못했지만 돌이켜 보니 알바생에게 괜히 미안하다.
지금은 라벨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먹는 와인이 어떤 품종인지, 어떤 양조장에서 만든 와인인지 알아보는 재미로 검색하는 것뿐, 와인을 구입하고 마시는 데 품종과 지역, 와이너리의 인지도를 크게 고려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와인을 마시는 이유가 거창한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초대한 손님에게 좋은 대접을 해드리고 싶어 내놓는 와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집에서 파스타나 맵지 않은 떡볶이에 좋은 곁들임 음료가 필요한 것뿐이다.
이렇게 혼자서 와인을 먹다 보니, ‘붉은 고기에는 레드 와인, 해산물에는 화이트 와인’이라는 유명한 공식이 백 퍼센트 맞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공식과 원칙이 중요한 일이 있지만 기호 식품에 ‘이 음식은 이렇게 먹어야만 해’라는 공식은 없다. 기호 식품은 그때그때 자기가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다. 스테이크와 먹든, 된장찌개와 먹든, 과일과 먹든 상관없다. 와인이 도수가 세면 물을 타서 마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향과 맛이 풍성한 최상급 와인이라면 아깝지만 편하게 자주 마실 용도의 중저가 와인은 충분히 그렇게 마셔도 아깝지 않다. 와인 문화가 수천 년간 이어 온 나라들에서는 전혀 이상한 방식이 아니다.
다만 음식이 아닌 중저가 와인을 와인 그 자체로 즐기고 싶다면 최소 2개 종류의 와인잔을 구비하면 좋다. 보르도 잔과 버건디 잔이 대표적이고, 여기에 한 종류를 더 추가한다면 피노누아 잔을 사면 된다. 모양이 다른 각 잔에 와인을 따르면 향과 맛이 더 풍부하게 느껴지게 하는 잔이 분명히 있다. 그럼 그 와인은 그 잔으로 마시면 된다.
와인을 마시게 되면서부터 버킷 리스트가 하나 생겼다.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내 주변 사람들은 와인을 즐겨 마시는 사람이 없어서 꺼내지 못했던 말이 있다.
우리 집 앞에서 가볍게 와인 한 잔 할래?
지인들과 와인을 마실 때는 분위기 좋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주로 마셨는데, 솔직히 나에게 와인을 마시기 아주 적절한 장소는 아니다. 너무 시끄럽거나 너무 격식 있었다. 언젠가 와인을 좋아하는 친구가 생기면 편의점 간이 테이블에서 와인을 마시며 도란도란 얘기하고 싶다. 친구가 전화로 ‘야, 와인잔 가지고 내려와!’ 하면 나는 씻어놓은 버건디 잔 두 개를 들고 내려가는 것이다. 편의점에서 막 나온 친구의 손에는 칠레산 화이트 와인이 들려 있다. 버건디 잔에 어울릴 수도, 안 어울릴 수도 있지만 일단 그냥 마신다. 그냥 그렇게 이번 주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와인 한 잔, 두 잔 하고 싶다. 분명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아멘.
사진/그림. 헵시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