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지만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영화도 있다.
나는 영화 평론가가 아니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 감상 완료 리스트’ 파일에 다 본 영화 제목을 넣고 평점을 매긴다. 처음에는 지금까지 감상한 영화를 쭈욱 엑셀로 적어놓았는데 적다 보니, 그냥 영화 제목만 적는 것이 심심해서 평점까지 매기게 되었다. 별점은 기존 영화 평론계처럼 별 반 개부터 별 다섯 개까지 주는데, 내 나름의 별점 기준이 있다.
☆ : 보지 마라
★ : 볼 거리 또는 스토리가 있다.
★☆ : 볼 거리 또는 스토리가 있지만 추천하지 않는다.
★★ : 볼 거리도 있고, 스토리도 있다.
★★☆ : 볼 거리, 스토리도 있지만 (다시 볼) 매력은 없다.
★★★ : 볼 거리, 스토리, 매력이 있다.
★★★☆ : 잘 만들었지만 뭔가 찝찝해서 다시 보기 싫거나 매력이 약하다.
★★★★ : 잘 만든 훌륭한 영감 주는 영화. 강추
★★★★☆ : 훌륭한 영화이고, 개인적 영감도 주지만 재관람하기는 좀...
★★★★★ : 인생 영화
기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별 반 개 점수는 다시 보지 않을 영화들에 추가한다. 별 반 개짜리는 다시 보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는 표시일 뿐 점수가 더 높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매긴 평점 기준으로는 별 네 개짜리 영화가 별 네 개 반짜리 영화보다 더 나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마치 B+가 A-보다 낫게 느껴지는 것처럼.
이런 기준으로 별점을 매기는 이유는 나는 봤던 영화를 다시 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인데, 이렇게 정리를 해놓으면 굳이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을 다시 봐서 또 느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나는 봉준호 감독의 작품을 다 좋아하지만 《플란다스의 개》는 다시 보고 싶지 않다. 중간에 윤주(이성재)가 이웃집의 시끄러운 개를 목매달아 죽이는 장면을 봤을 때 느꼈던 충격과 경악감을 다신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김보라 감독의 《벌새》 역시, 시대의 부조리함을 온몸으로 저항하다 벽에 부딪혀 무력해져 버린 한 어른이 현실에 발버둥 치고 있는 섬세한 사춘기 여학생을 보듬고 위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좋은 영화이지만, 영지(김새벽)가 갖고 있는 무력감이 지금 이 시절 청년들에게도 여전한 것이어서 영화를 보는 내내 아픔이 상당했다.
위의 예시들은 별 세 개 이상의 영화, 즉 별 세 개 반, 네 개 반짜리 영화들이다. 별 세 개 미만의 영화, 그러니까 별 반 개, 한 개 반, 두 개 반짜리 영화들은 내용적으로 재미가 없었기 때문에 굳이 그 영화들은 추천하지도, 말하지도 않겠다.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는 영화들이 모두 다시 보기 힘든 영화들은 아니다. 대체로 동물을 잔인하게 어떻게 한다거나 아무리 영화여도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거나, 영화를 보고 나서도 별 반 다르지 않은 현실을 강하게 마주하는 내용은 좀 힘든 것 같다. 그런데 나와는 달리 이런 영화를 오히려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나의 별 세 개 반, 네 개 반짜리 영화들을 소개한다.
김보라 감독, 《벌새》
왕가위 감독, 《화양연화》
봉준호 감독, 《플란다스의 개》, 《기생충》
데미안 셔젤 감독, 《위 플래쉬》
데이비드 핀처 감독, 《파이트 클럽》
조 라이트 감독, 《어톤먼트》
조나단 캐플러 감독, 《피고인》(1988)
적어놓고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박찬욱 감독 영화가 없는 게 신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