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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nald May 14. 2021

이사의 기쁨과 슬픔

불과 얼마 전에 이런 문장으로 시작되는 글을 쓴 적이 있다.「갑작스러운 사건을 계기로 인생의 방향이 크게 틀어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얼마 전에는 갑작스레 이사를 했다. 이사 이야기가 나오고 이사 갈 집을 보고 나온 매물 중 살 집을 고르기까지 무척 짧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런데 일사천리로 마무리된 계약과 달리 이사와 정리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였다. 이사 갈 집을 결정하는 건 주어진 선택지 중 마음을 정하면 되는 일이지만 집을 정리하는 건 결국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동네로 하는 이사였음에도 물건을 빼서 새로운 공간에 가구를 재배치하고 물건을 다시 제자리에 수납하는 일은 엄청난 노동과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다. 이사 소식을 들은 친구가 건넨 말이 그제서야 떠올랐다. "야, 이사하면 기본 세 달은 걸려."


이사가 결정되고 제일 먼저 시작한 건 엑셀로 도면을 그리는 일이었다. 주어진 공간에 가구가 알맞게 들어갈지 어떻게 배치하는 게 가장 효과적일지를 따지기 위해서였다. 공간의 사이즈가 넉넉하다면 걱정이 덜 하지만 컴팩트한 공간에선 조금만 사이즈가 오버돼도 플랜 자체를 바꿔야 한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구조가 나올 때까지 요리조리 테트리스 하듯 침대, 옷장, 책상의 위치를 바꿔서 시뮬레이션해보다가 조언이 필요할 때는 감이 좋은 친구들에게 물었다. "이것 좀 봐줘. 어떤 게 나아?" 결국 엑셀 시트는 Room_4, Room_5까지 늘어났고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한 구조였던 Room_5로 결정되었다. 처음부터 이 도안이 떠올랐으면 좋았을 테지만 아시다시피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시트 이름이 Final_1, Final_2까지 가지 않은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번 이사를 통해 꽤 많은 물건을 버리고 구입했다. 처음에는 책상만 구입할 생각이었는데 기존에 살던 분께 옷장을 받고 새로운 책상을 놓았더니 방 분위기가 바뀌었고 바뀐 분위기에 부응하고자 기존의 책장과 CD장도 처분해야겠다는 생각이 이사를 하고 나서야 들었다. 새롭게 변신할 방의 모습을 그려보느라 이럴 거면 진즉 버리고 올걸 왜 이고 지고 왔을까 같은 후회는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처럼 마음에 꼭 맞는 책장을 발견하지 못해 지칠 즈음 당근에서 '이 정도면 괜찮겠지...' 라며 다소 느슨한 마음으로 구입한 책장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화이트와 크림 화이트는 비슷한 컬러가 아니라 전혀 다른 컬러라는 사실을 대충 뭉갠 탓이었다. 재당근을 하기 위해 글을 올렸다가 책장을 신발장으로 변신시킨 뒤에야 비로소 글을 내릴 수 있었다. 다음 날 가벼운 마음이 된 나는 IKEA로 향했는데 필요한 아이템을 검색하다 보면 결국 이게 마음에 안 들고 저게 싫은데 이거 저거 다 뺀 기본템이 왜 없지?라는 물음표가 생길 때면 정답은 언제나 IKEA에 있기 때문이다. 왜 진즉 IKEA를 보지 않았을까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 후에야 나는 조금 후회했다.


당근에서 씁쓸한 실패를 맛본 나와 달리 엄마는 승승장구하는 장군처럼 쿨거래를 이어가셨다. 핸드폰에 어플을 깔아드리고 계정을 만들어서 사용 방법을 알려드리자 이사 날짜가 잡힌 날부터 아이템을 하나씩 구입하시더니 어느새 매너 온도와 거래 후기에서 나를 앞서기 시작했다. 꽤 이른 시간부터 나갈 채비를 하셔서 "어디 가세요?"라고 물으면 "당근하러~"라는 대답이 돌아오곤 했다. 엄마의 매너 온도는 어느덧 38.4도를 넘었고 거래 후기에는 '시간 약속을 잘 지켜요.',  '친절하고 매너가 좋아요.' 같은 후기가 줄을 이었다. 청출어람은 어쩌면 우리 엄마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인테리어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시드니에서 처음으로 독립을  이후였다. 월세를 내기 시작하니  안에 소품 하나를 들일 때도 신중해지고 애착을 갖게 되었다.  자그마한 공간을 사용하는데 이렇게  비용이 들다니...! 그렇다면  쓰고 싶었고 이왕이면   나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인테리어가 전적으로  손에 달린 일이라 생각하니 어렵다기보다는 초보 독립자는 그저 신이 났다. 물건 구매에 신중하고 한번 구입한 물건은 오래 쓰는 편이라 아이템이 늘어가는 속도는 더뎠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것들로 천천히 공간을 채워나갔다. 5 동안 부지런히 쉐어와 렌트를 오가며 알게   매일 쓰는 집을 내게 알맞게 세팅했을 때의 만족감이었고 가만히 집에만 있어도 좋다는  알게  사람은  이전으로 돌아갈  없단 사실이었다.


인간을 바꾸는 방법은 3가지뿐이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 이 3가지 방법이 아니면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새로운 결심을 하는 것.'은 가장 무의미한 행위다. - 오마에 겐이치 <난문쾌답>


이사를 한지 어느덧 3주가 다 되어 간다. 갑작스럽게 이사를 해야 한단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통보받고 짐을 정리하고 지난 3주 동안 부지런히 새로운 공간을 쓸고 닦았다. 이사 도중 TV가 아작나고 새 책상을 구입하기 까지 당근 거래 불발과 같은 슬픈 에피소드는 생략하기로 한다.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출현하는 과정을 수십 차례 반복했더니 이제는 정말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모든 게 번거롭고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가 즐겁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처음 집을 보러 갔을 때부터 이 공간은 이렇게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던 걸 하나씩 실현해나가는 쾌감과 뿌듯함 아닐까? 플러스 그동안 못 버린 유물들을 한 번에 싹 버리는 개운함 정도. 오마에 겐이치의 말에 따르면 사는 곳이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긴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눈에 보이는 풍경이 이전보다 마음에 드니 일단 50%는 성공한 거 아닐까. 이제 막 이사를 마친 자는 섣부른 결심을 하기보단 침대에 누운 채로 긍정 회로를 마음껏 돌려본다.




(*) <이사의 기쁨과 슬픔>은 장류진 작가의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을 인용한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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