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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의 삶공부 Mar 23. 2022

친정 엄마가 정의하는 사돈어른, 사위에 대한 정의


어제, 딸의 시어머님으로부터 떡케이크를 선물 받았습니다.

카톡 선물로 축하 영상은 주말에 미리 도착했어요. 

며느리 생일에 맞추어서 며느리에게 축하 케이크로 축하해 주고 싶으셨나 봅니다. 

미국에 있으니 제게 주고 싶으셨나 봅니다.


“이쁘고 지혜로운 00 어머니” 이렇게 시작하는 영상이었습니다.

“우리 00을 낳아서 이렇게 이쁘고 지혜롭게 길러주신 00 어머니께 이 케이크를 드립니다.”

이런 영상의 내용으로 제게 배달된 케이크입니다. 

마음 크시고 넓으신 제 딸 시어머님께도 너무 고맙습니다.

딸 덕분에 내 사위 엄마에게까지 케이크 선물을 받게 해 준 내 딸에게도 정말 고맙더라고요.

딸 시어머님께도 내 딸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했어요.






내 몸만큼 사랑하는 자식이 태어났고

그 자식과 오래 사랑하며 살아왔습니다.

어느 날 사위라는 인연으로 또 다른 가족이 생겼습니다.

이 인연의 조합이 무엇인지?

참 많은 깨달음이 오더라고요.



처음엔 받아들이기가 참 어려웠습니다.

엄마와 딸의 인연으로 살아가던 우리의 공간에 

또 다른 인연이 들어왔다는 것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것도 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관계로


어느 날 이렇게 하는 상황이잖아요.

지금까지는 둘(엄마랑 딸)이 죽고 못 사는 사이였다가

(딸과 사이가 엄청 좋았거든요. 우리는 전생에 부부였나 봐라고 제 딸이 말할 만큼요)

서로 엄청 사랑한다고 공공연히 말해 놓고는 

어느 날, 제 딸이 엄마를 부르더니 

자기에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제게 양보하라는 일방적인 보고잖아요.

엄마는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거랑 같은 상황이잖아요.

그 마음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요.


제 딸도 언젠가는 결혼할 사람이 생길 거고 결혼도 할 거라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난 사위라는 새로운 인연이 생길 거라는 예상도 했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그 황당함이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더라고요.

황당해도 따질 수가 없는 것이 이 법칙이더라고요.

이렇게 억울할 수가요.



결혼 앞두고 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나절 내내 훌쩍거렸습니다.

“딸아, 엄마가 이해는 되는 데 마음이 아직 내 머리를 따라주질 않아.

엄마에게 마음 추스를 시간을 좀 주면 안 되겠니? 

엄마가 우리 딸 너무 사랑했으니까

딸의 사랑이 어디 가는 것 아닌지는 아는데, 

허전해지는 이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엄마가 엄마 마음을 잘 달래볼 테니까 엄마에게 시간을 좀 다오. “



“엄마, 엄마랑 난 창자가 이어졌던 사이잖아. 그것도 10달 동안이나.

내 마음이 어디 가는 것 아니니까 엄마, 너무 서운해하지 마.

그리고 엄마, 난 영원히 엄마의 딸이니까 딸이라는 인연이 어디 가니?

어떻게 오빠(딸이 부르는 호칭입니다)와의 인연이랑 비교를 할 수 없는 관계잖아.

엄마랑 난 천륜인데. 비교가 안 되는 인연인데. “



마음 바로 추스르지 못하고 몇 시간이나 계속 우는 엄마를 이런 말로 위로하면서 오래 꼭 안아주더라고요. 

저도 제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며 아닌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아픈 마음에 더 상처 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더 땡강 부리고 말을 안 들어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흐르는 대로 슬픈 대로 제 감정이 흐르는 대로 허락해 주었습니다.

눈물도 솔직한 감정이니까요. 건강한 감정이니까요. 



한참을 울면서 딸의 위로도 받았더니 저절로 마음이 챙겨지더라고요.

좋은 선택을 하는 시간이 오더라고요.

‘맞네. 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니 이 인연이 너무 귀한 인연이구나!’

‘딸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니 엄마인 내게도 가장 사랑하는 인연이 되는 것이구나!’

이런 깨달음이 확 오더라고요.



사랑하는 내 딸을 사위에게 맡기면(바통터치의 개념)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 딸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니 엄마만큼 잘 챙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엄마가 정성 다해 키운 존재이니 사위에게도 이 마음을 전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랑 바통터치해 주어서 고맙다는 말도 전하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사위의 엄마 입장에서 보면 마찬가지였습니다.

귀하게 정성 다해 키운 아들을 내 딸에게 바통터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빨리 바통터치하고는 딸과 사위가 한 마음으로 뛸 때 우리는 온 마음으로 응원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통 터치도 제대로 못해주고(어쩔 수 없어서 해 주고는)

자식이 뛰는 것도 못 뛰게 옆에서 얼쩡거리면 그 게임은 지는 결과가 오는 것은 뻔한 이치였습니다.






사돈이라는 인연은 

가장 사랑하는 내 자식을 공유하는 사이더라고요.

내 자식 사랑하는 그 깊이로 며느리도 사위도 사랑할 수 있는 인연이더라고요.

예사 인연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의 깊이가 얼마나 깊어져야 가능한 일이었는지요.

그런데 되더라고요.


내 자식 사랑은 그 깊이에서 차이가 나니까 

내 자식 정성 다해 챙기는 것은 저절로 되니까

내 자식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내 사위라니까 

그 사랑의 깊이만큼 내 사위에게도 실천이 되더라고요.

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딸을 가장 사랑하는 엄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기꺼이 이 사랑이 실천이 되더라고요.



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손자가 생기고 손녀가 생기고

딸이 사랑하는 사람이 셋이 되었습니다.

이 셋의 인연까지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겠더라고요.

딸에게 하는 그 사랑과 헌신과 정성이 오롯이 실천이 되더라고요.






엄마로 살지 않았다면

내 자식 통해서 사랑의 진짜 깊은 의미를 알지 못했다면

온전히 주는 사랑, 그래도 더 행복한 사랑의 진짜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온전히 줄 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투정하지 않고 기꺼이 줄 때 

그 사랑은 저절로 되돌아오더라고요.



시간의 많음, 공간의 함께 함의 여부가 엄마가 받아들이는 사랑이 아니라

질적인 소통의 정도가 내 자식이 주는 사랑이면 되더라고요.

나머지는 딸이 사랑하는 가족에게 그 사랑이 쏠려도 하나도 질투 나지 않더라고요.

제가 느끼는 자식이 주는 사랑으로 비롯되는 행복은 차고 넘치더라고요. 

그렇게 자기 가족에게 쏠리는 그 사랑조차 얼마나 기특하고 예쁘고 고맙던지요.



딸도 진정한 사랑을 배워가고 있으니까요.

온전히 주고, 기꺼이 주고, 정성 다해 주는 엄마의 헌신적인 사랑을 배워가고 있으니까요.

건강한 사랑을 배워가고 있으니까요.

건강한 사랑은 또 그 자식에게 건강하게 계승되어 갈 거니까요.



엄마의 온전한 사랑, 기꺼이 주는 사랑, 헌신적인 사랑은 

나 자신에게 온전히 깃들어서 나에게 실천이 될 때 가능한 일이더라고요.

나를 온전히 사랑해 내는지

나에게 기꺼이 사랑을 퍼부어 주는지

나를 헌신적으로 보살피고 정성 다해 돌보는지

이 사랑의 실천이 가장 깊은 사랑이더라고요. 

이 사랑만 실천되면 내 자식 사랑은 저절로 실천되더라고요.

나를 안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안 돌볼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식 사랑으로 뻗어가는 건강한 사랑이니까요.

자식 하나도 안 다치게 하고 건강하게 성장하게 돕는 사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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