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오르는 것으로는 절대 꼭대기에 이를 수 없어
지나간 토요일 새벽은 <꽃들에게 희망을> 이 책으로 사람들과 독서토론을 했습니다.
어렸을 때 몇 번 접해본 이 책 속에 이런 비밀이!
이런 깨달음이 들어 있는지를 감탄하면서 읽었습니다.
너무 울림이 커서 울면서 읽었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독서 토론하면서 한 번 더 깊이 깨달아지는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세상이 꽃으로 가득 차려면 수많은 나비가 필요합니다.
책의 제일 마지막 부분, 감사의 말 속의 첫 문장입니다.
왜 이 책 제목을 <꽃들에게 희망을>이라고 지었는지 알겠더라고요.
애벌레가 고치를 거쳐 나비가 되어가는 여정,
나비가 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단계 더 뛰어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책이었습니다.
나비가 되어서 할 일을 제시하고 있더라고요.
세상이 꽃으로 가득 차도록(아름다운 세상이 되도록)
수많은 애벌레들을 나비로 탄생하도록 돕는 선한 사명감을 알아차리고 돕기 위해서
나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꽃들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나비의 역할!
애벌레들의 희망이 되는 나비가 되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멋지고 의미있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내가 먼저 나비가 되어야 한다는 엄중한 숙제를 안겨주는 책이었습니다.
그러고는 그 방법을 차근차근 알려주는 책이었습니다.
‘그저 먹고 자라는 것만이 삶의 전부는 아닐 거야.
이런 삶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게 분명해.’
이런 의문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문에 답하다 보면 내가 지금 애벌레라는 사실,
애벌레로만 머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냥 확신이 서지는 않습니다.
여러 번의 과정을 거쳐서 확신의 단계가 온다고 말해 줍니다.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가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고 끝없이 위로만 올라가다가
이게 아니란 걸 깨닫고는 함께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풀밭에서 신나게 놀고 맘껏 풀도 뜯어먹고 서로 사랑했지만
또다시 깨닫습니다.
‘이게 삶의 전부는 아닐 거야. 무언가 더 있을 게 분명해.’
하지만 호랑 애벌레는 다시 꼭대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길을 떠납니다.
혼자 남은 노랑 애벌레는 자신에게 또다시 질문을 합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틀림없이 그 이상의 것이 있을 거야.”
어느 날
늙은 애벌레 한 마리를 만나고는 매달려 있는 고치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나비가 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단다.”
나비란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합니다.
“나비는 미래의 네 모습일 수도 있단다.
나비는 아름다운 날개로 날아다니면서,
땅과 하늘을 연결시켜주지.
나비는 꽃에서 꿀만 빨아 마시고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사랑의 씨앗을 날라 준단다. “
나비의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말해 줍니다.
이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는 순간 다그쳐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나비가 되죠?”
노랑 애벌레는 자신도 나비가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나비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물어봅니다.
나비가 될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간절함’
날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날기를 원해야 돼.
하나의 애벌레로 사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간절하게. “
날기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애벌레의 편안한 삶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날고 싶은 그것이 무엇인가요?
고치의 죽은 듯한 그 기간을 견뎌 내어야 나비로 탄생한다는 것이지요.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잠시 들어가 머무는 그 집을 기꺼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일어나는 동안, 고치 밖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비는 이미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란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야! “
내가 되고 싶은 나비의 모습을 꿈꾸며 삶에서 경험하고 축적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고치의 기간, 축적의 기간을 보내고 계시는지요?
우리 반 아이들과 하는 ‘미덕 필사’ 25분간의 생각하는 독서‘
이런 것들이 우리 반 아이들의 고치의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비로 탄생하도록 돕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레는 경험이고 기다림입니다.
매일 아침 이렇게 글을 쓰는 시간도 저의 고치의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514 챌린지를 1년 동안 참여하고, 사람들과 매주 미래 공부를 하는 것도 저의 고치의 기간입니다. 언젠가는 나비가 되어 탄생할 것이기에 예견된 기다림의 기간이기도 합니다.
“호랑 애벌레는 새삼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높이 오르려는 본능을 얼마나 잘못 생각했는지.
꼭대기에 오르려면 기어오르는 게 아니라 날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꼭대기에 오르려는 본능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비로 탄생하겠다는 각오이니까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다른 사람처럼 되고 싶어서 안달을 하고
수단, 방법 안 가리고 그 사람을 밟고 넘어서고
그런 삶을 저도 젊어서는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에게 직접 피해는 안 갔지만
혼자서 질투하고 시기하고
부대끼니까 멀리하고....
그런 소극적인 방법으로 또 다른 애벌레 기둥을 오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나비를 진심으로 부러워했다면(그런 삶이 멋지다고 생각했다면)
나도 나비가 되고 싶었다면
그 나비에게 다가가 온 마음으로 물어봐야 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나비가 될 수 있어요?”
간절히 물어봤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그렇게 묻고 있습니다.
직접 묻지 않더라도
책에게도 묻고, 유튜브에서도 묻고, 공동체 사람들에게도 묻거나 힌트를 얻습니다.
물을 수 있는 통로가 얼마나 많은지요.
나비가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간절함으로 꼬투리 속에 들어가기를 별로 주저하지 않습니다.
고치 속의 기간을 경험하는 힘은 고치 후의 예견된 미래에 대한 설레임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가 나비가 된 후의 삶이 너무 행복하고 멋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나비의 소명이란
꽃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는 일(꿀을 날라다 주는 일)
즉 다른 나비에게 나비가 될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내 자식에게 해야 할 일,
교사인 제가 우리 반 아이들에게 해 주어야 할 일이 바로 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먼저 내가 나비가 되었는지?
아니면 고치의 기간을 잘 견뎌내고 있는지 점검하는 중입니다.
내가 나비가 되면 다른 애벌레들을 나비가 되는 길로 인도할 수 있다니 너무 설렙니다.
부모님의 모델링, 교사의 모델링이 나비로서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녀에게 너도 나비가 될 수 있다고 끊임없이 말해주는 일,
나비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삶으로 보여주고 또 보여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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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나비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서 갔다가, 날아서 돌아왔습니다.
자리를 따라오라는 듯이, 그러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했습니다.
그래서 호랑 애벌레는 노랑나비를 따라갔습니다.
어느덧 그들은 나뭇가지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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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나비는 그중 하나에다 머리와 꼬리를 차례로 집어넣는 시늉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날아와 호랑 애벌레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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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고 살면 나비가 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보여줍니다.
그러고는 다시 가서 겁먹고 있는 호랑나비를 다독이고 어루만져 줍니다.
부모의 끊임없는 모델링
용기를 주는 표정, 말 등이
내 자식을 나비로 변화시킬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치의 그 기간을 견뎌낼 거라는 각오를 하고 고치 속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는 나비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짊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속에 고치의 재료가 들어 있다면, 틀림없이 나비의 재료도 들어 있을 거야.”
이런 확신을 내 자식 사랑하기에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치의 기간이 습하고 어둡고 무섭지만 기꺼이 경험해 낼 수 있는 게 사랑하는 내 자식 나비의 길을 안내해 줄 수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먼저 나비가 되어 보아야 내가 꽃에게 꿀을 옮겨 줄 수 있으니까요.
내가 내 자식 애벌레에게 나비가 되는 고치로 들어가는 흉내를 내어 줄 수 있으니까요.
고치의 기간이 그냥 고치가 아님을 나도 알기에 내 자식 머리 쓰다듬어주고 용기의 말을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해 줄 수 있으니까요.
내 자식의 나비가 되어야 한다는 임무를 맡은 이 성스러운 책임감이 너무 고맙습니다.
내가 먼저 나비가 되어야 한다는 이 엄명이 눈물겹게 감사합니다.
기꺼이 감당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