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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읽는인간 Sep 17. 2020

랜선을 타고 내려온 파운드케이크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 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기억할지 모르겠다.


뚜- 뚜- 뚜-

띠용. 띠용. 띠용


수화기를 들면 들렸던 (지금은 정겨운) 모뎀 통신의 소리.


당시 전화요금 폭탄에 벌벌 떨면서도 끊을 수 없었던 ‘초성으로 영화 이름 맞추기’랄지, ‘일본 드라마 공유방’ ‘J-pop동호회’등등 추억의 채팅방. 야밤에 퍼런 스크린 불빛을 쬐며 뭘 그리도 열중했었는지.


요즘은 공기 중에 와이파이가 떠다닌다는데 (뼛속까지 문과인 저는 아직도 그 원리를 잘 모르겠습니다;;)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던 90년대 후반만 해도 인터넷은 물리적인 접속물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수화기 너머 들리는 그 괴상한 접속음에 묘한 안심감을 느끼기도 했으니까.


실제로 채팅방에선 ‘번개’ 같은 만남이 빈번히 이뤄졌고 그렇게 만난 사람들끼리 좋은 인연을 맺어간 케이스도 있었으니, 그 시절 인터넷은 지금보다 아날로그적 감수성이 짙은 공간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그즈음 개봉한 영화들 (유지태 김하늘의 동감, 전지현과 이정재의 시월애, 전도연 한석규 주연의 접속 같은)은 ‘물리적 거리를 초월한 연결’을 주제로 한 것이 유독 많았던 것 같다.


이후 프리챌, 싸이월드 같은 동창과 일촌의 관계를 지나 랜선 너머의 세상은 실제보다 점점 넓고 깊어져 이제는 #해시태그로 관심사를 입력하기만 하면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도 코멘트를 주고받을 수 있는 인스타그램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짱구 머리 모니터와 몸통이 따로 놀았던 데스크톱에 비해, 손바닥 속 작은 네모 안에서 주고받는 정보의 양은 더 많아지고 횟수도 빈번해졌다. 그 물량에 파묻혀 오히려 익명성이 보장되기도 한다. 가족이나 직장 동료들에게는 말 못 할 이야기, 소소한 취미나 흥미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들이 #태그를 타고 흘러 누군가의 공감을 자아낸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나 역시 최근 #1일1인스타 에 재미가 들려 틈만 나면 엄지손가락이 씰룩씰룩거린다. (물론 잘 조절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


계정이야 진즉 만들었지만 먹고 놀고 마시는 소비성 게시글을 올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조금 질려있던 차, 글을 쓰고 싶다는 동기와 맞물리면서 이전과는 다른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인데, 관점을 달리하니 익숙했던 것들 사이로 점차 다른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이, 성별, 지역, 출신, 직업 같은 거추장스러운 계급장을 떼고, 그 사람이 진정 좋아하고 흥미를 갖고 있는 것, 바쁜 일상 속에서도 애써 짬을 내서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것, 가슴속 깊이 묻어둔 생각과 감정 들이 차곡차곡 축적된 모습을 보면서 이 촘촘한 정사각형의 틀은 보이지 않는 나를 꺼내어 불완전한 형체를 확인하고 다듬어가는 공간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손에 잡히지 않는 와이파이를 타고 다시금 사람 간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도.




띵- 똥-


가족들이 둘러앉은 저녁시간.


‘이 시간에 누구지?’

‘택배입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현관으로 나가보니 수취인란에 선명히 적혀 있는 내 이름. 신선 포장된 택배 상자 속에는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 들어있었다.


'이게 왠 일, 아니 웬 케이크이라니!!'

나보다 더 놀란 건 우리 시어머니.


보낸 이는 다름 아닌 인스타그램을 통해 알게 된 @coucou_bake 님이었다. 사연인즉 얼마 전 내 피드에 올린 『예술하는습관』이라는 책을 보시고 “이 책 너무 읽어보고 싶네요”라는 코멘트를 남겨주셨기에 비록 읽은 책이긴 하지만 같은 일본에 살면서 보내드릴 수 있는 거리에 있다면 기꺼이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에 넌지시 주소를 여쭤보았던 것인데...


내가 보낸 한 권의 책이 수제 파운드케이크와 달콤 꾸덕 브라우니로 되돌아올 줄이야!


수취인은 제가 맞는데요 ... 'Home made cake' 이라뇨...


세상에... 세상에...


젓가락을 놓고 어리둥절해하는 가족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도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고장 난 라디오처럼 세상에... 세상에... 를 연신 반복했다. 사진이라도 한 장 제대로 찍고 싶은데 그 와중에 쪼르르 달려와 잽싸게 브라우니 하나를 챙겨가는 아이.


덕분에 나는 예정에도 없이 저녁 식사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이 됐다. 그간 며느리가 새벽마다 방에 처박혀 뭘 꼼지락 대나 궁금해하셨던 시부모님에게 실은 책을 읽고 글을 쓴다는 것과, 그 글을 봐주는 분들을 알음알음 알게 된 사연. 그리고 그렇게 연결된 분들이 이렇게나 솜씨 좋은 분들이라는 걸 인스타그램의 피드를 보여드리며 물 만난 고기처럼 자랑을 했다.


시어머니는 이런 정성을 담아 보내주는 고마운 분이 어디 있냐며, 우리 며느리가 이런 친구를 둔지는 몰랐다고 한참을 칭찬해주셨다. 식구들 앞에서 이렇게 우쭐해보긴 또 처음이다. 어찌나 기분이 좋았는지 밥은 안 먹고 브라우니를 오물거리는 딸도 오늘만큼은 큰 맘먹고 눈감아 주기로 했다.


파운드케이크가 왜 파운드케이크인지 아세요?


다음 날 아침.


임신 중이긴 하지만 잊지 못할 이 특별한 만남을 기념하며, 향긋한 커피와 함께 정성이 듬~뿍 담긴 파운드케이크를 맛있게 즐겼다. '근데 엄마, 파운드케이크는 왜 파운드케이크야?'. 응? 듣고 보니 그러네. 사실 먹을 줄만 알았지 파운드케이크가 왜 파운드케이크 인지도 모르고 먹었네...


찾아보니 파운드케이크란 이름은 레시피에서 따 온 것이라고 한다. 케이크를 만들 때 밀가루 1파운드, 버터 1파운드, 계란 1파운드, 설탕 1파운드를 섞어 만드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게다가 어떤 재료와 섞어도 궁합이 좋아서 초콜릿 파운드케이크, 아몬드 파운드케이크, 녹차 맛, 오렌지 맛, 버터 바닐라 빈 등 과일이든 견과류이든 넣으면 넣는 대로 맛을 내는 도화지 같은 케이크라고 하니, 이 또한 마음에 쏙 드는 구석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랜선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온 파운드케이크.

여전히 시대는 변하고, 언젠가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기술도 발전하겠지만 도구는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 그 도구로 어떤 문화를 만들어 갈지는 인간들의 따뜻한 심장이, 온기가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나칠 수도 있었던 우연한 만남을 소중한 인연으로 매듭지어주신 @coucou_bake 님께 감사드리며... 조만간, 오프라인으로도 만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봅니다!!




▶︎@coucou_bake 님의 맛있는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coucou_b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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