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일루즈의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읽기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에바 일루즈 지음, 이학사, 2014
'왜 가요, 드라마, 영화는 맨날 사랑 타령만 해?!' 투덜대던 내게도 낭만적 사랑의 신화는 있었다. 드라마 <밀회>에서 오혜원(김희애)이 ‘한 사람을 만나고 나서야 놓치고 산 것들을 돌아보게 됐다’ 고 법정에서 말하는 장면 같은 것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욕망하고 자신을 학대한 과거를 성찰하는 용기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그 빛나는 순간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곤 했다.
수많은 소설가와 시인, 학자들이 간파했듯이 낭만적 사랑에는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전복적 힘이 있다. 일루즈는 낭만적 사랑의 전복성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낭만적 사랑은 사회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대한 감상의 우위, 이익에 대한 이유없음의 우위, 축적이 유발한 궁핍에 대한 풍요의 우위를 주장한다. 사랑은 사심 없는 증여에 의해 지배되는 인간관계의 우위성을 공언하면서, 개인의 영혼과 육체의 융합을 찬양할 뿐 아니라 대안적 사회질서의 가능성 또한 열어놓는다. 따라서 사랑은 위반의 아우라를 투사하며, 더 나은 세상을 약속하는 동시에 요구한다. 31쪽
근대 이후 종교가 쇠퇴하면서 로맨스는 그 자체로 종교가 되었다. 성스러운 것의 경험은 종교와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체물로 이동한다. 낭만적 사랑은 이러한 대체물 중 하나다. 이제 로맨스는 숭고한 사랑에서 말하는 구원의 서사와 멀어지고, 고통, 장애, 난관에서 분리되며, 의례의 속성을 취한다. 이 '의례'란 쉽게 말해, 남녀가 정장을 차려입고 영화관이나 공연에 가는 것, 멋진 레스토랑에 가서 와인잔을 기울이는 것, 프라이빗한 여행지에서 해변을 즐기는 것 같은 일들이다.
일루즈는 낭만적 사랑의 유토피아적 차원을 '경계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여행을 가서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거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분위기를 내는 일이 단순히 우리의 자유와 자율을 훼손하는 소비(마르크스의 입장)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 일들을 통해 규율과 질서, 합리와 효율로 점철된 일상에서 '경계'로 넘어간다는 것. 이 '경계'에서 비합리적으로 탕진, 소모하며 개인의 우위성을 확증하고, '사회질서에 반하는 의례를 상징적으로 재연'(32쪽)한다. (정확히 말하면 사회질서에 반한다기보다, 반하는 '시늉'한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일루즈의 주장의 핵심은 낭만적 사랑이 경계적인 것을 경험하고 유토피아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러한 경험이 계급에 따라 불평등하게 소비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이러하다. 결혼 전에는 계급을 막론하고 로맨스의 기본 형태들을 소비하지만, 결혼 후에는 노동계급에 비해 중간계급 이상은 로맨스를 더욱 다양하고 포괄적으로 경험한다. 멋진 저녁식사, 프라이빗한 여행, A열에서 즐기는 공연 등 여가나 로맨스 의례에 투자할 수 있는 돈과 여유 시간이 있고, 정교한 의사소통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 남성은 감정적 감수성이나 이야기하기를 사내다움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는 반면, 중간계급, 중상계급은 직업적으로 의사소통에 훈련되어 낭만적 의사소통에도 능할 수 밖에.
그뿐 아니다. 중간계급 이상은 강렬하고 쾌락적인 로맨스 의례에도 준비되어 있지만, 지속성과 장기성을 요구하는 사랑 정의에도 준비되어 있다. 결혼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인 치료요법 역시 성찰, 의사소통 등 중간계급 이상이 갈고 닦은 가치들을 요구한다.
결국 일루즈가 이 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는 낡은 개념이라 생각했던 '계급'.
계급 불문 파리바게트에서 케익 사고 스타벅스에서 커피 마시며 데이트 하는 시대, 소비자본주의는 사치재와 여가를 민주화하며 계급을 흐릿하게 지우는 듯 보인다. 그러나 '로맨스와 자본주의의 교차점을 찾고 그 관계를 규명'하겠다던 일루즈의 연구는, '로맨스는 우리의 사회구조에 불평등하게 분포된 하나의 재화다'라는 아픈 결론으로 끝난다.
낭만적 사랑은 시장으로부터의 '안식처'라기보다는, 오히려 '후기 자본주의의 정치경제학과 긴밀히 공모하고 있는 하나의 관행'(51쪽)이라는 그의 말에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다르다구! 돈으로 하는 데이트 진부하다구!' 외치고 싶었지만, 일루즈는 빠져나갈 자리를 주지 않았다. 교육자본과 경제자본을 가진 신중간계급일수록, 기존의 로맨스 이미지와 다른 '반대, 전복, 차이의 수사를 계발'(173쪽)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본 없이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없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한적하고 훼손되지 않은 해변에 가려고 할 때 정보력뿐 아니라 자금이 더 필요한 게 사실. 일루즈는 대중문화의 로맨스 이미지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이들이 '이미지에 대해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비판가이자, 동일한 이미지를 이용해 자신들의 낭만적 경험을 재현할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들’(190쪽)이라고 말한다. (저 말씀이세요?)
소비와 생산 사이, 경계적인 것의 경험과 합리적인 노동 규율 사이, 무계급적인 유토피아와 구별짓기의 동력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살아가는, 분열된 내 얼굴을 흐릿하게 마주한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었을 때처럼 세상이 아름다워보이지도 않고, 기든스의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을 읽었을 때처럼 뽕에 차오르지도 않는다. 씁쓸한 뒷맛을 다시며, 다음 책으로 걸어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