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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쓸 Oct 21. 2021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2012>로 본 관계기피증 남자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끝나나> 읽기

<사랑은 왜 끝나나>, 에바 일루즈 지음, 돌베개, 2020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 2012> 속 관계기피증 남자의 서사


생각없이 유튜브를 켰다가 드라마 <로맨스가 필요해 2012>의 영상을 보았다. 응? 이거 에바 일루즈가 주구장창 말하는 얘기인데? 바로 관계를 명확히 정의하기 싫어하는 남자와 감정적 관계를 원하는 여자의 조합. 


<로맨스가 필요해 2012>의 줄거리를 대충 살펴보면 이렇다. 주열매(정유미)랑 정석현이(이진욱)는 12년동안 6번 헤어지고, 섹스파트너로 애매한 관계를 유지한다. 주열매가 정석현에게 '아직도 좋아해' 라고 고백하지만, 정석현은 대답하지 않는다. 상심한 주열매 앞에 신지훈(김지석)이 나타나고, 주열매와 신지훈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왠 일? 정석현이 질투를 느끼고 주열매에게 돌아와달라고 한다. 그와중에 정석현의 동생이 사망하는데, 이유는 유전병. 그동안 주열매와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거나, 애매한 태도로 일관해온 정석현의 태도는 이 때문이었다. 결론은 주열매와 정석현의 해피엔딩. 



드라마에서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임에도 자신의 병을 철저히 함구하고, 12년을 사귀면서도 결혼은 거부하며, 애매한 태도로 일관하는 남자의 태도는 '유전병' 세 글자로 모두 설명된다. 유전병이 있어서 결혼을 거부했고, 유전병이 있어서 애매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누구보다 여자를 사랑했던 것... 이 드라마는 '관계기피증 남자'라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사실은 순정이 있는 남자'라는 환상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유전병이라는 단서 하나로 윤석현의 태도를 이해하기란 여전히 어렵다. 유전병이 있어서 결혼이 두려웠다면 왜 12년을 사귀면서도 그걸 비밀에 부치는가. 다시 시작하자며 주열매가 대답을 종용하자 왜 '네가 이래서 싫은거야' 라고 큰 소리를 치는가. 


내 결론. 윤석현은 '유전병이 있는 관계기피증 남자'다. 



에바 일루즈가 분석하는 '관계기피증 남자' 라는 문화적 현상


에바 일루즈는 <사랑은 왜 끝나나>에서 말한다. 섹슈얼리티, 감정, 결혼이 하나로 묶여 명확한 의례와 순서로 진행되던 근대 이전과 달리, 현대의 이성애 관계는 섹슈얼리티, 감정, 결혼이 세 영역으로 분리되었다. 결혼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섹스만 할 수도 있고, 감정이 없이 결혼을 할 수도 있다. 수많은 선택지가 생겨나고, 당사자가 주고 받는 행동의 토대가 애매해지며, 만남의 프레임은 불확실해졌다. 섹스는 관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며, 시작조차 아닐 수도 있다. 캐주얼한 섹스가 낳은 뜻밖의 결론은, '만남의 의미는 결국 남자가 정한다'(137쪽)는 것이다. 


캐주얼 섹스는 남성이 선호하는 섹슈얼리티다. 자유롭게 쾌락을 누리는 걸 여성도 좋아하지 않냐고? 그러나 우리가 고려해야할 것은 남녀의 사회적 배치가 엄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1) 남성은 여성보다 더 많은 성적 자유를 누리며 그래서 성적 영역에서 규범의 제한을 별로 받지 않는다. 더 나아가 남성성 자체가 많은 성적 파트너를 두고 이를 자랑하는 능력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2) 또한 여성에게 섹슈얼리티는 물질이나 사회적 자원과 교환하는 경제적 성격이 있는 반면, 남성은 섹슈얼리티가 사회 경제적 자원 획득을 위한 지렛대로 쓰이는 일이 거의 없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점. 3) 캐주얼 섹스는 거리두기를 함축한다. 쉽게 섹스를 하고,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감정적 거리두기를 가져온다. 아쉬울 것 없다는 태도로 감정적 거리를 유지할 때, 상대방보다 우위에 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불확실한 관계 속에서 여자가 더 많이 갈등하는 이유


여자도 거리두기 하면 되지 않냐고?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페미니즘(의 한 조류)은 여성도 캐주얼 섹스를 하며 자율성을 키우고 돌봄 대신 직업적 출세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캐주얼 섹스를 한 후 여성이 후회, 수치심, 자기회의에 시달린다는 연구결과가 많다. 왜 그럴까?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관계 중심적으로 해석될 수 밖에 없다. 여성에게 관계성이란 '사회적 역할(예를 들어 어머니 역할)이자 동시에 경제적 지위(예를 들어 간병이나 양육)를 뜻하는'(148쪽) 것이었고, 이 역할과 지위가 여성의 감정-문화적 정체성이다. 여성이 돌봄의 역할로 경제, 문화, 사회적 생산에 큰 몫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정체성을 단박에 벗을 수 있을까.


그 결과, 성적 자유는 남성과 여성에 각각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남성은 자율성과 거리 둠과 축적이라는 양상으로 성적 자유를 만끽하는 반면, 여성의 성적 자유는 겉으로는 자율성을 표방하는 것 같지만 여전히 관계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양면성을 보인다. 


일루즈의 다른 저서 <사랑은 왜 아픈가>는 성적 자유와 불확실한 관계가 여성에게 불리해지는 이유를 다른 측면으로도 설명한다. 결혼과 출산을 염두에 둔 이상, 남성과 달리 여성은 '가임기'이라는 생체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데, 이 시간적 제약이 여성을 불리한 위치로 내몬다는 것. 일루즈의 소름끼치도록 생생한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결혼시장에서 현대 중산층 여인의 시간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니라 ’임신 가능성‘의 시한으로 똑딱인다. (<사랑은 왜 아픈가>, 150쪽)


캐주얼 섹스가 만연하는 불확실한 관계 속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조급해질 수 밖에 없고 권력은 기울어진다.


<로맨스가 필요해 2012>에서 주열매는 왜 정석현을 사랑했을까


그가 싸가지 없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관계의 우위를 점하고 주열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는 뭘까. 드라마에서는 긴 시간동안 애정과 신뢰를 쌓아온 둘만의 추억을 길게 묘사한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중요한 측면이 있다. 윤석현과 12년을 사귀고 헤어지는 사이 주열매는 33살이 되었다. 그녀는 유능한 음악감독이지만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나이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다. 결혼과 출산을 염두에 둔다면 더더욱. 반면 시나리오 작가인 윤석현은 나이가 들수록 직업적 인정과 더불어 섹슈얼리티를 더욱 인정받는 위치에 있으며, 출산으로 인한 시간 압박에서도 자유롭다.


드라마의 한 장면. 주열매는 "키스를 오만번 정도 했으면 그 여자에게 책임감은 안느껴지니?" 라고 말하지만 윤석현은 "입술은 너만 닳았니?"라고 되묻고, 주열매의 친구는 "누가 누굴 책임져. 각자 알아서 사는 거지."라고 대신 답한다. 그러나 경쟁이 심한 섹슈얼리티 시장에서 '각자 알아서 산다'고 할 때 그 댓가는 주열매에게 더 혹독하다. 주열매가 윤석현에게 애정 혹은 미련을 갖는 것에는 12년이 지나는 사이 둘 사이에 기울어져버린 구도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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