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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쓸쓸 Oct 22. 2021

낭만적 사랑과 평등은 같이 갈 수 있을까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아픈가> 읽기

<사랑은 왜 아픈가>, 에바 일루즈 지음, 돌베개, 2013



'할 일을 그렇게 무 자르듯 명확하게 자를 수 있는 게 아니야'


언젠가 밥 먹은 그릇을 식탁에 올려둔 것으로 시작된 부부싸움, 남편은 말했다.


"할 일을 그렇게 무 자르듯 명확하게 자를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는 말했다.


"그건 명확하게 할 일을 분배하지 않아도(아니 분배하지 않아야) 손해볼 게 없는 니 생각이지."


그러나 나도 알고 있다. 육아와 가사에는 끝도 없이 예측 불가능한 장면들이 샘솟으며, 이를 공정하게 분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작은 장면 하나하나 타협, 협상, 신경전을 치르는 동안 나의 에너지는 바닥나고, 상대에 대한 낭만적 감정은 짜하게 식는다.


아이를 낳은 후, 나는 직장과 학업으로 바쁜 남편에 대한 피해의식과 짠한 마음 속에서 널뛰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든 근본적인 의문들.


육아와 가사라는 거대한 과제 앞에서 허우적대는 지금, 낭만적 사랑은 과연 가능한가? 

아니, 그보다 먼저, 평등과 사랑은 정말 양립 가능한 것인가? 



평등을 향한 시도는 낭만적 사랑과 대치되는가


감정사회학의 대가 에바 일루즈는 나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하나. 사랑과 평등은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배릿과 로버트 브라우닝, 디드로와 소피 볼랑, 해리엇 테일러와 존 스튜어트 밀, 사르트르와 드 보부아르처럼 평등을 자랑하는 관계가 사랑의 강력한 화학작용이 된 짜릿한 사례'(357쪽)가 분명 역사 속에 있다. 불평등한 상황, 굴욕과 수치, 저속함 속에서 에로틱한 분위기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일루즈는 평등과 그보다 근본적인 사랑의 합리화 과정은 다르다고 말한다. 일루즈는 과학, 기술, 정치 영역의 합리화 과정이 낭만적 사랑의 믿음을 파괴했다고 말한다. 심리학, 정신분석학, 진화생물학 등을 통해 사랑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 보편화되고(과학 영역), 심리학 지식과 인터넷 기술의 영향으로 배우자 선택 과정이 정교해지며(기술 영역), 평등과 합의와 호혜의 규범, 즉 계약사상이 사랑에 체계적인 행동규칙을 만들어낸 것(정치 영역)이 그러하다. 이러한 합리화 과정이 사랑에 열정적으로 몰두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희생하는 것을 어렵게 한다.


일루즈의 두번째 답은 낭만적 사랑이 전통적으로 불평등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남성이 무릎을 꿇고 여성에게 꽃다발을 건넨다거나, 여성에게 문을 열어주는 행위를 '가슴 만져도 되나요?' 묻는 행위보다 에로틱하게 느낀다. 이유는 뭘까. 권력을 가진 쪽에서 경의를 표하고 자신을 낮추는 행위, 즉 연기를 하는 행위가 에로틱한 유혹의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 행위는 '남자가 여자에게 행사하는 권력을 미화한다'(359쪽).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에로틱하게 만들어온 핵심은 전통적인 남녀 이분법과 이에 따른 차별적 구도인 셈이다.


서구의 가부장 문화에서 발달한 에로티시즘은 '오른손/왼손'의 관계과 비교될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에 뿌리를 둔다. 여기서 남성과 여성은 철저하게 다르며, 저마다 자신의 농밀한 정체성을 연기한다. 농밀한 정체성, 바꿔 말해 농후한 차별성이야말로 전통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에로틱하게 만들어온 핵심이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권력은 이미 위태로운 권력이다. 바로 그래서 권력은 복잡한 의미를 창조하지 않을 수 없다. (...) 그러니까 전통적인 연애에서 지켜오던 '여성을 향한 정중한 예의'는 남성이 자신의 권력을 그럴싸하게 꾸며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361쪽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함께 살며 성장해갈 결정적 능력이다'


결혼 9년차. 남편에게 기댈 수 있는 듬직한 어깨, 결기나 생일에 이벤트를 해주는 자상함을 요구하는 시기는 지났다. 육아를 함께 하는 동지이자 인생에 찾아오는 일을 회피하지 않고 함께 겪는 친구이길 바란다. 그러나 다른 성별에 기초한 우리 관계가 전통적인 낭만적 사랑의 코드와 의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평등을 꿈꾸다 합리적 관계라는 딱딱함의 함정에 빠지는 건 아닐까. 


일루즈는 과거의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서 여전히 크게 긍정한다. 에필로그에서 '자아를 그 전체로 온전히 실현하는 방식으로서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함께 살며 성장해갈 결정적 능력이자 동시에 인간과 문화가 활용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472쪽)이라고 전제한다.


사실 우리 모두에겐 대가 없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 신성함과 유일무이함에 압도되는 경험, 비합리적이고 탕진하는 사랑에 대한 열망이 있다. 이 열망이 비합리적이라 해서 버릴 수 없고, 오히려 우리의 삶에 있어 소중한 경험으로 장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성애 관계에서 결혼, 출산, 육아를 겪는 한복판에서, 평등하면서도 열정적인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가능한가? 사랑 안에서 평등은 어떻게 재정립될 수 있는가? 일루즈는 이런 나의 물음표에는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사랑과 평등 사이, 여전히 보이지 않는 길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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