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훅스의 <사랑은 사치일까?> 읽기
<사랑은 사치일까>, 벨 훅스 지음, 현실문화, 2020(개정판)
어느 여름밤, 독서모임에서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을 읽고 화상채팅중이었다. 불친절한 책을 힘겹게 통과해 이른 결론은 ‘사적 영역에 유폐되어 친밀성을 계발해온 여성들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혁명을 만들 수 있다’. 아이고, 집에서 가사분담으로 싸우는 것도 힘겨운데, 새시대를 만들 사명까지 짊어져야 한다니, 여기저기 곡소리가 나왔다.
나는 눈치없이 해맑았다.
“저는 ‘그래, 내가 트렌드리더야! 내가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사람이라구!’ 하면서 뿌듯했는데요?!”
그 멘트가 인상깊었나. 종강기념 오프모임, 서로의 낯선 얼굴을 매칭하며 한 학인이 말했다. ‘아, 트렌드리더 쓸님!’ 한 학인은 내 멘트에 얼굴을 넣어 캐리커쳐를 그려주었다.
내 발언은 진심이었다. (ㅋㅋ) 나는 내가 성공과 성취만이 전부라고 믿는 세상에 속하지 않아서, 진보와 개혁을 말하지만 점심 뒷정리는 하지 않는 교회 (남자)어른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생각한다. 변방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면, 여자들이 세상을 바꿀 것이다. 남성들이 계발하지 못한 친밀성과 애정의 형식으로. 으하하.
벨 훅스의 <사랑은 사치일까?>는 이런 나의 의기양양함을 한껏 꺽어놓았다.
여자들이 종종 남자들보다 더 보살피는 존재이더라도,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을 더 잘 안다는 뜻은 아니다. 사랑은 보살핌과 헌신, 지식, 책임감, 존중, 그리고 신뢰가 결합된 것이다. 보살피는 기술을 사회적으로 배운 여자들은 사랑을 원한다면 더 쉽게 그 기술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여자들은 사랑의 기술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사랑받는 것이 권력을 뺏긴 자의 것, 나약함의 표현으로 여겨지는 한 여자들은 온전히, 깊이, 완전히 사랑하기를 두려워할 것이고 계속해서 사랑에 실패할 것이다. (124쪽)
벨 훅스의 문장에 나는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사랑은 단지 보살피는 기술이 아니었다. ‘보살핌과 헌신, 지식, 책임감, 존중, 신뢰’는 자기 자신의 충만한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 모두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충만한 영혼에 대해, 내면의 기쁨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가부장제 안에서 사랑은 실패하기 쉬웠기에 무기력에 시달렸다.
물론 여성들에게는 사랑하기에 좋은 자질과 경험이 있다. 낭만적 사랑에 대한 관심, 돌봄에 집중했던 경험, 공적 세계에서의 소외감... 그러나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낭만적 사랑의 덫을 직시하게 한다.
가부장적 세계는 일단 사랑을 위한 여정을 떠나도록 우리 여자들을 부추긴 다음 그 길목에 장애물을 놓았다. 이것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인생의 비극 중 하나다. (19쪽)
그러나 낭만적 사랑 포함, 사랑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하다. 사랑은 우리 삶의 핵심이고,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연약함이나 의존성의 증거가 아니기에. '자아실현'을 중시하는 페미니즘의 이미지가 사랑을 말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찾아야 한다. 성공에 대해 그러하듯 아니 그보다 더 열정적으로, 그리고 '독창적'으로.
그래, 그렇게 사랑이 중요하다는데, 사랑 그거 어떻게 하는거니? 사랑에 관한 여러 질문들이 던져진다.
여성이 자기 몸에 가지는 부정적 감정만큼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라는 추정에 어긋나는 것은 없다.(143쪽)
이 문장에 반박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내 외모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바꾸려 애쓰는 데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다. 외모에 적당히 무심하기를 택했으나 스스로를 사랑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시간이 남아돌 때면, 나 역시 내 신체를 낱낱이 발가벗겨 잔인하게 평가하는 ‘신체적 파시스트’(149쪽)가 되었다.
아직도 나는 거울 속 내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면, 쌍커풀 수술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작은 무쌍 눈을 탈피하고 싶은 욕망과 거대한 성형산업에 일조하는 데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망설이면서. '스스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여성의 신체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다시 생각하는 작업'(155쪽)이라는 문장 속에 오래 머무른다.
작년, mnet의 오디션 서바이벌 <퀸덤>이 화제였다. <퀸덤>에는 서로의 성장과 변화를 응원하는 여성 가수들의 동지애가 조명받았다. 문득 떠오른 나의 대학시절. 우리 과는 남녀 성비가 거의 1:1이었지만, 술 많이 먹고 활발한 남학우들이 과문화를 주도했다. 여학우가 관심을 받는 경우란 이쁘거나, 남학우에 대적할 정도로 술을 잘 먹거나, 이쁜데 술을 잘 먹거나... 우리 모두 과문화를 주도하는 남학우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남학우들의 이성애적 사랑의 대상이 되거나, 남성 이상으로 털털함을 과시해 캐릭터를 구축하는 수밖에.
처음 후배를 맞은 2학년 초, 어설프게 꾸민 여자 후배들보다 ‘누나 누나’ 하며 다가오던 남자 후배들이 더 편했던 건 왜였을까. 나는 왜 그때 여자 후배들에게 더 다가가지 못했을까. 잊고 있던 기억이 <퀸덤>를 보며 내내 부끄럽게 떠올랐다.
여성들끼리의 질투-특히 나이가 많은 여성이 어린 여성을 질투하거나, 여성들이 뛰어난 여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태도-에 대해 벨 훅스는 ‘오직 한 명의 여성만이 승자가 되거나 간택될 수 있다는 동화의 논리에 기반을 둔 여성 혐오’(170쪽)라고 말한다. 가부자제의 시선에서 여성은 누군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존재, 결핍된 존재이다. ‘특출난 동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여성들의 깊은 내면에는 자기 존재가 부정될 것에 대한 두려움’(172쪽)이 있고, 이 두려움이 자매애를 막는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 내가 주목받지 않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 누군가 특히 여성 동지들의 성취와 미덕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칭찬할 수 있게 된다는 것, 자매애에 더 설레게 된다는 것. 자매애를 더 깊이 경험할수록, 우리의 삶은 더 충만해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질문.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까. 먼저는 어떤 남성을? 벨 훅스는 가부장제와 남성 개인을 분리한다. 문제는 가부장제이고 가부장제에 저항하는 남성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할 줄 아는 남성를 찾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살펴봐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개인적 성장과 정서적 개방, 진정성, 성숙도, 책임감, 높은 자존감과 삶에 대한 긍정정 태도’. (261쪽) 그러나 가부장제가 남성의 내면을 지배하는 문화에서 남성들은 이런 덕목을 기르기보다 보상과 권력에 연연하기 쉽다.
사랑을 행하는 남성을 찾기 쉽지 않다면, 동성애라는 합리적 선택지도 가능하다. 낭만적 관계가 아닌 우정 속에서도 사랑을 배울 수 있다. 벨 훅스는 ‘낭만적 우정’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낭만적 우정은 ‘강렬한 유대에 에로틱한 측면이 있고, 그 측면이 유대를 강화하고 심화하는 동력이 된다’(258쪽)는 면에서 우정과 다르다.
나를 고양해주는 관계들을 생각한다. 남편 만나 결혼했으니 끝,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맥락에서 유대를 경험해왔고, 앞으로도 예측할 수 없는 인연들 속에서 그러하리라.
한낮의 여름처럼 맹렬했던 독서를 지나, <사랑도 사치일까?>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읽었다. 여럿이 둘러앉은 여름밤, 왕언니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듯. 관습적 관계, 사회적 역할, 습관화된 무기력, 헌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사랑의 자리에 더 가까이 설 수 있을까. 사랑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기는 시대, 사랑을 두려움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