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바 일루즈의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읽기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에바 일루즈 지음, 이학사, 2014
그와 그녀는 대학 시절, 기독교 교육철학 세미나에서 1년간 함께 공부했다. 그는 철학에 빠져 대학 시절 전부를 보냈고, 무언가에 깊이 빠진 사람에게서 풍기는 생기로 가득했다. 그녀는 그가 아는 것을 소박한 언어로 풀어내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태도가 좋았다. 좋아하는 학자를 이야기할 때 쌍꺼풀진 큰 눈을 반짝거리는 게 좋았다. 그 눈은 세상이 사랑하지 않는 무언가를, 대가없이 사랑하는 눈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세미나에 뜸해지면서 둘의 만남도 자연스레 끊겼다.
그로부터 1-2년 후. 그녀는 국가고시를 접수하러 왔다가 낯선 거리를 헤매는 중이었다.
“너 00 아니니?”
“어머, 오빠!”
그는 근처에서 열리는 철학 세미나에 왔다고 했다. 여전히 반짝거리는 그의 동그란 눈에 그녀는 낯선 거리의 긴장감을 추스렀다.
바뀐 연락처를 교환한 후, 둘은 가끔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드문드문 연락을 이어가는 사이, 그는 가족의 만류로 철학 공부를 접고 취업을 했다. 바짓단이 질질 끌리는 양복에 커다란 구형 노트북을 메고 새벽출퇴근을 하며, ‘학벌만 좋은 바보같은 놈’이란 질책을 들었다. 그녀는 한 기독교 단체에 들어갔다 좌절을 겪고, 국가고시를 준비하던 참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키에르케고르의 소망과 좌절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녀는 그 이야기에 힘입어 그녀의 이야기를 숨김없이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국가고시에 떨어진 후 예상치 못한 곳에 취업을 했다.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돌연 수능을 준비해 교대에 갔다. 그와 그녀는 서로의 청춘이 때로는 자신의 신념을 배신하는 방향으로, 때로는 알 수 없는 곳에서 길이 샘솟는 방향으로, 굽이굽이 흘러가는 걸 지켜보았다. 둘에게 서로는, 아름다운 무언가를 지킬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시기를 지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조심스레 가늠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교대에 간 후 그는 자격지심과 불안감에 예전의 생기를 잃었지만, 그녀는 그의 반짝이는 눈과 함께 나눈 대화의 기억을 잊지 못했다.
2012년, 둘은 결혼했다.
결혼은 여전히 자주 최고로 유용한 자산을 가진 파트너를 찾는 것이며, 그렇기에 연애결혼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낭만적 관계 속에서 시장적 관점을 만들어냈다. (338쪽) 아가페적 사랑과 에로스적 사랑은 분석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둘은 사랑의 관행 속에서 사회학적으로 화해된다. (362쪽)
둘이 결혼할 때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아직 학생인데 결혼을 결심하다니, 대단해!”
그러나 그녀에게도 나름의 계산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교대 다니니까 언젠간 교사가 되겠지.' 비영리단체에 근무하는 그녀에게 그가 가질 직업적 안정성은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연봉이 많지는 않아도 정년이 보장되어 있고 시간적 여유가 비교적 많다는 것이 좋았다.
그정도 계산은 했으나 집에 자산이 얼마나 있는지 어떤 집에 사는지 등등은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 않았다. 결혼 후 그녀는 가끔 생각했다. 우연히 만나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어떻게 학벌도 비슷비슷하고 양가의 경제적, 문화적 계급도 비슷비슷하지?
“우리는 우리의 짝이 지닌 시장 가치보다 개인적 자질을 사랑하면서도, 어째서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부합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가?” 360쪽
양가 집안 분위기는 소름끼치도록 비슷했다. 유교적 전통이 강하고 경제자본보다 교육자본을 중시했으며 명예와 감투를 좋아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노후걱정은 크게 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으로 먹고 살았다. 연애하며 알게 된 사실, 그의 아버지와 그녀의 아버지는 경북 어드메 같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두 집안은 시골 양반이라는 오랜 자부심으로 서로의 집안과 대대로 혼인을 맺었고, 그와 그녀가 결혼을 결심할 때 '서울 한복판에서 @@ 0씨를 만나다니, 천생연분이야!' 라는 찬사를 보냈다. 같은 지역 출신이니 집안 분위기가 비슷할 수 밖에.
그녀에게 약간의 계산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이야기가 통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키에르케고르의 소망과 좌절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녀는 자신의 좌절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이는 그일 거라 생각했다. 영혼이 통한다고 믿던 날이 있었다.
둘의 이야기가 잘 통했던 이유. 둘은 비슷한 상위권 대학의 문과계열을 전공하며 당시의 대학문화와 학문적 흐름을 흡수했고, 같은 기독교 동아리에서 기독교 담론을 배웠다. 영혼이 통한 줄 알았는데 문화자본이 비슷했던 것. 그들이 서로의 소망과 좌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영혼의 떨림 이전에 ‘유사한 정도의 문화적 능력과 교육 자본’(407쪽)을 확인했고, 여기에는 어떤 ‘지식인 취향’(397)이 반영되어 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유사한 영혼들의 행복한 우연한 결합의 효과’(405쪽)라기보다, ‘소비 양식, 계급 성원 의식, 취향, 그리고 상징적 자본으로서의 이야기하기 간의 미묘한 조응의 결과’(405쪽)였던 것.
중간계급과 중상계급 응답자들에게 대화는 낭만 추구의 한 형태지만, 그것은 그들의 파트너의 문화적 교육적 조화 가능성을 측정하는 데 일조한다. 이야기하기는 대부분 두 파트너에게 유사한 정도의 문화적 능력과 교육 자본이 요구되는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것은 유사한 배경을 가진 파트너를 선택하는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이다. 407쪽
글을 읽은 분들은 눈치챘겠지만 모두 나의 이야기다. 동일한 로맨스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 내 사랑은 낭만적 사랑이었을까, 계산적 사랑이었을까. 시작은 분명 낭만적 사랑이었는데 왜 하고보니 계급적 이해관계에도 들어맞는 선택이 된걸까.
엥겔스와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진정한 사랑을 사유재산의 영역 바깥에서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반면 부르디외는 낭만적 사랑과 계산적 사랑은 잘 통합된 '아비투스'(개인적 정체성과 취향처럼 주관적으로 작동하고 소통되지만 문화적 경제적 자본의 위계질서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습관, 생각, 기질의 총체 365쪽)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게 화합되어 있다고 말한다. 의식적으로 계산해 상대방을 선택하지 않지만, 낭만적 사랑의 바탕이 되는 정체성이나 취향은 문화적 경제적 자본과 뗄레야 뗄 수 없으니까.
일루즈는 말한다. 관계의 초기는 부르디외의 입장과 같이 상대방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자산에 기초할 가능성이 크지만, 관계의 발전 과정에서 다른 사랑의 범주들이 필요하다고. '성인의 삶은 합리적 사리 추구적 유대와 아가페적 유대 사이를 왔다 갔다'(421쪽)하고 있다고.
나는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 7장을 읽으며 여러 문장에 밑줄과 함께 'ㅋㅋㅋ'를 적었다. 나의 로맨스를 여러 갈래로 해석하는 시간을 보냈다. 낭만적 사랑과 계산적 사랑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7장), 낭만적 사랑에도 계산적 사랑에도 문제의식을 갖는 '분열된 자전적 서사 구조'(305쪽)속에서(5장), 이해관계가 없는 사랑과 사회적 재생산이라는 결혼의 모순을 치료 요법으로 해결하려는 시도(6장)를 반복하며,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구나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