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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람 Jun 08. 2022

아이가 태내 기억을 이야기했어요

쉴 새 없이 떠든 혼잣말 태교의 결과

  첫아이 행복이를 만나기까지 마음고생이 심했다. 이유 없이 반복되는 유산으로 한 번씩 소파 수술을 받고 나면 한동안 우울감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해가 갈수록 마음의 여유가 사라졌고, 나보다 늦게 결혼한 친구들의 프로필 사진이 아기 사진으로 바뀔 때마다 죄책감과 억울함이 뒤섞여 눈물이 차올랐다. 2년 만에 '습관성 유산'진단을 받고 대학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중에 행복이를 가졌다. 네 번째 임신이었다. 이번에는 난황이라는 게 꼭 생기기를. 태아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하늘에 기도했고, 불안함에 밤을 지새우며 다음 검진일을 기다렸다.  


  임신 7주 차. 쿵쾅쿵쾅 우렁찬 심장 소리가 진료실에 울려 퍼졌다. 원장님이 내 손을 꼭 잡아주며 말씀하셨다.


"들리시죠? 아주 건강하네요. 축하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지 못하고 줄줄 흘리며 울었다. 원장님은 휴지를 건네주시며 "엄마가 울면 어떡해요." 하셨다. 엄마라니. 내가 엄마라니!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듣고 다음 검진 날짜를 잡고 나와서 앉아있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산모 수첩에 초음파 사진을 붙여서 건네주셨다. 정말 받고 싶었던 연두색 산모 수첩. 다른 산모들이 겨드랑이에 끼고, 두 손에 꼭 쥐고 다니던 그 산모 수첩을 나도 드디어 받게 된 것이다. 보세요! 여러분 저도 이제 엄마랍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를 어떻게 그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종교와 비견되지 않을까? 진작에 구입해놓은 노란색 <임신 출산 육아 대백과> 책은 나의 바이블이었다. 주수에 맞춰서 해당되는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내 몸은 지금 어떻게 변해가는지, 행복이는 뱃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자라고 있을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 알려주는 등불이었다. 태교와 관련된 책들도 챙겨 읽었다. EBS 다큐 책부터 유명 연예인이 쓴 책까지 가리지 않고 읽었다. 태아에게는 아빠 목소리를 들려주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고? 밤마다 지친 남편을 붙잡고 <탈무드 태교 동화>를 읽어달라고 졸라댔다.


  그 좋아하는 커피도 라면도 끊고 여름이 왔다. 청각이 급격하게 발달한다는 5개월이 됐을 때였다. 아이가 내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생각에 밤낮없이 혼자서 떠들어댔다. 출근할 때도 입은 쉬지 않았다. "지금은 라디오를 듣고 있어. 엄마가 정말 좋아하는 전현무 아저씨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야.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네. 오늘은 행복한 하루가 될 것 같아."


  수업을 할 때는 행복이가 듣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화도 내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엎드려 있는 학생들에게 목소리를 높였을 텐데 갑자기 학생들이 자식처럼 느껴졌다. "일어나야지. 세수한 번 하고 올까? 너무 피곤하면 좀 쉬어. 대신 이따 학습지는 꼭 제출해야 해." 활자화하니 닭살이 돋는다. 맙소사. 내가 이랬다고? 새 생명의 탄생은 이토록 경이롭다.


  한여름의 저녁 6시는 대낮이나 마찬가지이다. 퇴근해서는 마당과 시골길을 산책하며 의식의 흐름대로 떠들었다.  

  "이 꽃은 해바라기야. 해를 따라 꽃이 움직여. 이 꽃은 누드베키아야. 해바라기랑 비슷하게 생겼지? 옥수수가 열렸어. 옥수수수염 좀 봐. 할머니는 옥수수수염을 깨끗이 씻어 말려서 차를 끓이셔. 복숭아가 다 떨어져 버렸네. 여기 장수풍뎅이가 있어. 이게 장수풍뎅이 맞나? 엄마도 잘 몰라. 어쨌든 곤충이야. 곤충은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져 있고, 다리가 여섯 개야. 날개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지. 거미는 곤충이 아니야. 다리가 여덟 개거든."


  누가 옆을 지나가면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 정도 예의는 지키면서 혼잣말을 했다. 달이 가고 세 번의 계절이 바뀌었다.   

  "이제 가을이야. 가을에는 단풍이 들어. 빨갛고, 노랗게 나뭇잎 색깔이 변하지. 은행잎은 노란색, 단풍잎은 빨간색으로 변해. 엄마도 왜 변하는지는 몰라. 엄마는 가을이 좋아. 가을은 바람도 시원하고 하늘도 높고 또 엄마 생일이 가을에 있어. 우리 행복이는 겨울에 태어나겠구나. 저기 피어있는 국화는 가을을 대표하는 꽃이야. 엄마는 별로 안 좋아해. 작은 벌레가 많이 생기더라고. 행복이는 엄마처럼 벌레 안 무서워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시골 육아'는 행복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됐다.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와 비슷한 게 여자들의 '임신 출산 이야기'가 아닐까. 여자들 사이에서 흔해 빠진 산고와 수유의 고통은 차치하고 행복이가 포동이로 세상에 태어나 쑥쑥 자라 34개월이었을 적 이야기를 옮겨 본다.




  포동이의 말문이 트여 '세상에 내 아이가 영재인가! 저 쪼끄만 게 부사어를 쓰다니!' 매일 아이가 새롭게 배워 말하는 단어들을 곱씹으며 기쁨에 젖어있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사이 나는 둘째까지 낳았다. 아이를 재울 때 종알종알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 나누는데 그날따라 잠이 안 온다며 뒹굴고 또 뒹굴었다. 그러다 포동이 손이 내 배에 닿았다.


"엄마 이 안에는 지금 누가 있어?"

"지금은 아무도 없지."

"왜 아무도 없어?"

"우리 포동이랑 동글이랑 다 태어났으니까. 이제는 아무도 없어."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서 입을 뻐끔거리기 시작했다.


"나 엄마 뱃속에서 (뻐끔뻐끔)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나는 깜짝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했다.

"오, 우리 포동이가 그랬구나. 기분이 어땠어?" 하고 물었다.

"진짜 달콤했어. 엄마랑 나랑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엄마 기억나?"


이게 태내 기억인가. 4년 전에 읽었던 육아서를 떠올렸다. 그 책을 읽으며 '나도 내 아이에게 태내 기억을 들을 수 있을까?' 조금은 기대했었는데 이렇게 준비 없이 훅 들어오다니.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응, 엄마랑 이야기 많이 했지. 기억해줘서 고마워."

온 힘을 다해 아이를 꼭 안아줬다.


그리고 이어진 아이의 마지막 한 마디.

"그런데 엄마, 그때 너무 답답했어."


  답답했다는 기분까지 들으니 정말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거구나 확신했다. 아이와 나만 아는 시간. 아이와 내가 한 몸이었던 시간에 대해 대화하다니. 나에게 이런 기적이 일어나다니. 평범한 내가 이렇게 특별한 아이를 낳았나 싶어 잠든 아이 볼에 입을 몇 번이나 맞췄다.  


  그날 이후로도 잊을만하면 "포동아, 엄마 뱃속에 있을 때 기억나?"하고 물었다. 듣고 또 듣고 싶으니까. 녹음도 해놓고 싶고, 다른 이야기도 더 듣고 싶으니까. 포동이가 작심을 한 듯 나를 노려봤다.






"그만 좀 물어봐!"

   

어휴, 무셔워라. 역시 뭐든 적당히가 좋아? 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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