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위하여 / 나희덕
"엄마, 천천히 가요"
아이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칭얼거린다.
그 팔을 끌어당기면서
아침부터 나는 아이에게 저녁을 가르친다.
기다림을, 참으라는 것을 가르친다
"자, 착하지? 조금만 가면 돼.
이따 저녁에 만나려면 가서 잘 놀아야지."
마음이 급한 내 팔에 끌려올 때마다
아이의 팔이 조금씩 늘어난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아이를 남에게 맡겨야 하고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다른 것들에 더욱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게 삶이라는 것을
모질게도 가르치려는 것일까.
해종일 잘 견디어야 저녁이 온다고,
사랑하는 것들은 어두워져서야
이부자리에 팔과 다리를 섞을 수 있다고
모든 아침은 우리에게 말한다.
오늘은 저도 발꿈치가 아픈지
막무가내로 울면서 절름거린다.
"자, 착하지?"
아이의 눈가를 훔쳐주다가
나는 문득 이 눈부실 햇살을 버리고 싶다.
시집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비(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