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건강검진을 받던 날, ‘정신건강’이라는 글자에 형광펜이 그어진 내 차트를 보았다. 뒷장을 넘겨보니 ‘우울증 의심’에 표시가 되어있었고, 문제가 되는 문항을 찾아보니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낀다.], 와 [일에 흥미가 없다.] 및 몇 개의 문항에 높은 점수를 준 부분에 브이자로 체크가 되어있었다. 일을 그만둔 뒤 가끔 무료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막상 병명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어쨌든 나는 내 이름 옆에 쓰인 ‘정신건강’이라는 글자에 형광펜 줄이 그어진 차트를 들고 이 진료실 저 진료실을 오고 가며 검사를 받았다.
결혼 후 회사를 그만두고 처음 한 달 정도는 정말 좋았다. 이제 나를 귀찮게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늦게 자고 싶으면 늦게 자고, 늦잠을 자고 싶으면 늦게 일어나면 됐다. 느지막이 일어나 티브이를 보거나 책을 읽었고,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원데이 클래스나 학원을 다니며 배웠다. 내키는 날에는 집에서 빵을 굽고, 퍼지는 빵 냄새를 맡으며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며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하지만 몇 개월 뒤, 그 모든 것이 시시해졌다. 그토록 꿈꾸던 평일 낮에 나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갈수록 모든 것이 무료하게만 느껴졌다. 어느새 나는 집에서 티브이를 보는데 하루의 절반을 할애하고 있었다. 억지로라도 움직이려 시도한 운동만도 여러 개.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포기하기 일쑤였다. 간단한 집안일 외에는 내가 하는 일이 없으니, 흘려보내는 이 시간들이 아깝게 느껴졌다. 나아가 남편에게 짐이 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퇴사를 권한 장본인이 남편이라, 당사자인 남편 본인은 내가 일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데도 말이다.
정해진 스케줄에 맞춰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집 근처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았다. 남편은 격하게 반대하며 혹시 자신이 벌어오는 돈이 부족하냐고 물었다. 나는 가계소득과는 관계없이, 내 일상 중에 고정된 스케줄이 있다면 이 무력감을 조금이나마 채워줄 것 같아서,라고 대답했다. 남편 입장에서도 답답한 노릇이었을게 분명했다. 진급과 동시에 꽤 오른 월급을 받게 되어 내게 회사를 그만두길 권했고, 하고 싶은 일을 찾고 배우길 바랐는데,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 아르바이트라니. 사실 남편은 내가 대학원 진학이나 글쓰기 등등 내가 흥미 있어하고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찾길 바랐었다. 허나 20대 중반, 대학 졸업과 동시에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내 흥미가 반영되었던 분야에서 일을 한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당장 월세와 생활비, 그리고 학자금 대출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려한 것은 연봉과 집에서의 거리, 단 두 개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적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을 하며 살다가 퇴사했다. 퇴사 후 막상 시간과 여유가 생기니 막연하게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배우며 하나 둘 야금야금 시도는 해보았지만, 역시 현실로 부딪혀보니 상상만 하던 때가 좋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 걱정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 그게 혼자 방세와 생활비를 벌어 쓰던 대학시절에 그토록 꿈꾸던 생활이었는데, 어느샌가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할 수 있는 일만을 찾는 사람으로 변해버린 나를 발견했다.
정신건강에 형광펜이 그어진 이유가 요즘 SNS나 책 제목에서 자주 회자되는 ‘자존감’이 낮아졌기 때문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속된 직장에서 정해진 업무를 이행하고, 그 대가로 고정된 급여를 받지 않게 됨으로써 지금의 내가 스스로 쓸모없다고 느낀다는 걸 인정해버렸기 때문에? 만일 그것을 자존감과 연관 지을 수 있다면, 사실 나는 살면서 자존감이 높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자존감이 낮아진 것이 아니라, 원래 낮았다. 또, 노력을 통해 어찌어찌 올리더라도 그 상태가 계속해서 지속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존감의 정확한 정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면 올라간다고 적힌 글들을 많이 보았다. 나는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편이고 누군가와 나를 비교하며 상처 받는 편도 아니다. 그리고 나이를 먹고 나서 느낀 내 장점인데, 장도연 씨가 티브이에서 말한 것처럼 ‘지인들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내 모습이 좋다. 세상이 이리 넓은데, 내 친구가 잘되었다면 내게도 기쁜 일이다. 나와 다른 분야라면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생소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친구가 대단하게 보이고, 같은 분야라면 그 친구에게 업무에 대해 자문을 구할 수 있으니 좋지 않을까? 왜 시기 질투를 자신 주변 사람들에게 돌리는지 이해가 안 간다. 어쨌든 내가 스스로에게 의구심을 갖거나 완벽을 추구했던 분야는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 내가 맡은 업무에 관한 일밖에 없었다. 내 실수로 팀원들에게 피해를 줬다고 느낄 때 말이다.
그러나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부분은 그 느낌이 무엇인지 확 와 닿지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늘 낯선 사람 앞에서는 주눅이 들었고, 업무 중에 실수를 하면 늘 자책하기 바빴다. 물론 이런 것들을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스킬도 나이와 함께 발전해 갔지만, 정말 깊은 곳에는 주눅 들고 자책하는 내가 있다. 20대에는 이런 내가 싫었다. 그래서 애써 당당한 척을 하며 살았다. 그리고 진짜 스스로 당당한 성격으로 변했다고 믿었던 적도 있다. 자기 암시에 꽤 능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와중에 어떤 어려운 난관을 만나게 되면, 긴 시간 동안 노력했던 것이 무색하게 금세 본래의 내 모습이 튀어나왔다. 바꿔보려고 온갖 책을 사 읽고, 책에서 말하는 처방(거울을 보며 사랑한다고 세 번 외치는 등)을 따라 하며 발버둥 쳐봤지만 그래도 잘 모르겠어서 지금은 그냥 내 성격이려니, 생각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요즘, 티브이만 보다 가끔 글을 쓰는 내가 스스로 크게 쓸모있는 일을 하고있다고 느끼지 않았고,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흥미 없는 직업만 골라 다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다는 이유로 정신건강에 형광펜이 그어졌다. 뭐 어쨌든,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과정은 이렇게나 험난하다.
스스로 현재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과, ‘스스로가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은 엄연히 다른 관점의 생각이다. 전자가 후자로 발전할 수 있겠지만, 스스로를 그렇게 되기까지 방치하면 안 된다. 때문에 현재 자신이 쓸모 있다고 여겨지지 않더라도, 당장 할 수 있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이 장기적으로 볼 때 더욱 남는 장사라고 본다. 부딪히고 그 분야에서 몇 년 구르고 나면 어느새 그 일 또한 ‘할 수 있는 일’이 되어 있을 테니까.
나 또한 ‘쓸모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 자꾸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 혹은 여태 해왔던 익숙한 일로 돌아가려는 습성을 버리려 노력 중이다. 아직 남은 내 반평생 동안 어떤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를 결정할,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선택의 시간이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흘려보낸 시간이 어느덧 일 년 남짓. 여전히 명확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하지만 막연히 뿌옇기만 하던 생각들 속에서 큰 틀 두어 개 정도로 범위를 좁혀놓았다. 지금 투자한 이 시간들이 훗날 나를 쓸모 있고 일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으로 바꾸어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