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방학을 보내러 온 손녀들과 함께 지내느라 하루하루가 꿈만 같다. 퇴근해서 집에 다 와 가는데 큰아이가 전화해서 어디쯤 오느냐고 물었다. 아파트에 들어서니 큰아이 소리가 들렸다. 난간에 서서 팔을 휘두르며 날 부르는 것이었다. 현관 앞에서는 작은아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 키우는 동안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환대였다.
아버지는 장손인 아들을 무척 아끼셨다. 써놓고 나니 당연한 일이다. 첫 손자였는데 그렇지 않을 할아버지가 어디 있겠나. 한 시간이면 찾아뵐 수 있는 거리였는데, 보고 싶어 하시는 아버지에게 아이 보여드리는 일에 그렇게 인색했다. 물론 한창 바쁜 시절이기는 했다. 아이가 고등학교 들어간 해 여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가 아이와 찍은 사진이 몇 장 없었다. 돌 되기 전에 이유식 떠먹여 주시던 사진, 아이 초등학교 졸업식 사진. 그게 전부였다.
큰아이는 났을 때부터 거의 매일 얼굴을 보고 살았다. 아이들이 사는 곳과 우리 사는 곳의 시차가 한두 시간에 불과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서울로 돌아오고 나니 시차가 일여덟 시간으로 늘어나 주말에나 한번 보기 바쁘기는 하지만, 그동안에는 이역만리 떨어져 살아도 늘 가까이 사는 것 같았고 매년 거르지 않고 만나 아이들과 쌓아온 아름다운 기억이 가득하다.
며칠 전 사이드웨이 박성열 대표가 아버지와 손을 맞잡은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나는 살아있는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없다. 두 분 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돌아가셨다. 그래서 아기가 양가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자라길 바랐는데… 어제 아버지가 심정지로 쓰러졌고, 몸이 워낙 약해져 있는 상태라 회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는 한다. 그래도 아버지가 화끈하게 일어나리라 믿는다.”
그 글을 읽고 박 대표 부친께서 얼른 회복하셔서 아이를 앞에 놓고 환한 웃음을 보이실 수 있게 되기를 기도했다. 길게는 아니더라도, 아이도 부친도 좋은 기억을 조금만 더 쌓을 수 있을 만큼만이라도 날수를 더해주시기를.
여느 날처럼 출근해 아침기도를 마치고 주말 사이에 무슨 연락은 없었는지 확인하고는 페북을 열었다. 박 대표가 숲길을 걷는 부친 사진과 함께 영면에 드셨다고 올린 글이 눈에 들어왔다. 헤아려 보니 아버지 손을 잡은 사진 올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마음이 흔들렸다. 돌아가신 부친께서 나보다 세 살 손위셨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박 대표와는 그가 펴낸 책에 대한 리뷰를 올린 것으로 인연이 되었다. 덕담을 주고받던 끝에 언젠가 내가 책을 내게 되면 박 대표가 그 책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펴낸 책을 열심히 읽은 독자에 대한 예의였을 것이나, 난 그 말을 마음에 크게 담아두었다. 그때까지는 내가 책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랬는데도 박 대표의 그 말이 참 고마웠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가당치 않게 책을 내게 되었다. 책을 쓰기로 매듭을 지은 건지 만 건지 애매할 때쯤 박 대표가 내 경험으로 중동 책을 하나 쓰면 어떻겠냐고 제안해왔다. 그렇지 않아도 그 말을 마음에 두고 있던 터였지만, 엉겁결에 집필을 약속했던 터라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몹시 아쉬웠다. 경험한 것을 탈탈 털어 책을 썼으니 이젠 책 쓸 건더기도 남아있지 않다. 앞으로 책을 쓸 일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도 그 제안은 내게 내내 감사한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박 대표 부친의 부음을 듣는 순간 출국을 며칠 앞두고 있어 마음이 부산하기는 했지만, 빈소는 꼭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부음 듣기 직전까지 박 대표와 부친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박 대표를 만나고 싶었는데 기회가 닿지를 않았다. 그런데 첫 대면이 문상이 되었다. 영정을 뵙고 무릎 꿇고 앉아 박 대표와 아내 되시는 이현진 선생, 두 분의 결실인 이담과 그 가족에게 하나님의 깊은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떠나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으셨을 부친께서 영면에 드실 수 있도록 품어주시기를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