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잉여일기

2023.09.21 (목)

by 박인식

서울로 돌아올 때 그저 산길 개천길 걷고 책이나 읽으며 소일하리라 생각했다. 물러서고 덜어내며 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물러서고 덜어내기는커녕 남들 앞에 나서는 일이 늘어나고 그러다 보니 삶도 요란해졌다.


생각해보면 내가 뜻한 대로 된 일이 없다. 전혀 기대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못한 길을 걸었다. 그래도 삶이 망가지지는 않았고 노년에 풍성한 삶을 누리고 있다. 모든 것이 섭리요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 몇 해 동안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안개 속을 걸었다. 그 기억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그곳과 그 시간을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곳에 살았다는 이유로 생각지 않았던 기회가 생기고 많은 이들과 교분을 나누며 지낸다. 덕분에 물러나기 전보다 오히려 더 넓고 깊은 세상을 살고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물러서고 덜어내겠다는 다짐을 무를 생각은 없다. 그럴수록 매일 아침 그 분 앞에서 다짐을 되뇌며 스스로를 경계하기를 힘써야 하겠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앞으로 또 어떤 길을 걷게 하실지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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