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맨눈을 향해 쏟아진 별

소설 연재

by 서인석

유독 낮의 기온이 높았던 탓인지 낮잠을 좀 길게 잤다. 밤에 신경이 곤두서 있어야 하는 나날이 반복되었고, 낮잠의 효율에 따라 관측 결과가 결정되기도 했다.


눈을 비비며 시간을 먼저 확인했다. 서둘러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어으!"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쭉 폈다. 차의 밖에는 아직 아무 장비도 설치하지 않았다.


일단 의자만 차 옆으로 꺼내어 잠깐 앉았다. 그리고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고 어슬렁거리며 몸을 풀었다. 몸에서 뿌드득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오래 자서 그런지 조금 시장했다. 조수석에 있는 미니 초코바 하나를 입에 물고 트렁크로 갔다. 천막을 주섬주섬 꺼냈다. 필요한 짐들을 꺼내면서도 틈틈히 시계를 봤다.


산 생활을 하다보면 해 지는 시간에 민감하다. 조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해가 있고 없고는 하늘과 땅 차이다. 관측을 위해서 해가 자리를 비켜줘야 하는 것과 정반대로, 관측에 필요한 장비와 환경을 세팅하기 위해서는 해가 자리를 지켜줘야만 한다.

예보에 나왔던 일몰시간을 감안했을 때, 장비 세팅보다 해지는 시간이 좀 더 이를 것 같았다.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회사를 다니던 때, 회의시간이 변경되어 우왕좌왕하며 자료를 준비하던 일은 빈번했다. 그런 날의 회의 결과는 십중팔구 좋지 않다. 관측 준비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급한 상태에서 준비하다보니 자꾸 손이 미끌어졌다. 자잘한 도구들을 다루는 동안 계속 삐끗하더니, 결국 집게와 클립이 들어있는 통을 흙 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차라라랑-

클립들이 흙과 자갈에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번개처럼 머리에 어떤 생각이 찌릿했다.


오늘은 관측하지 말자.


갑자기 머릿속이 석학 교수의 화이트보드와 같은 모양으로 바뀌었다. 작은 글씨들이 빼곡한 상상속 화이트보드를 단호히 슥슥 지웠다. 아마 적혀있던 글씨들은 관측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 준비에 걸리는 시간 등등이었으리라.


천막을 설치하는 대신, 바닥에 돗자리를 깔았다. 차 안에 있는 짐들 중 큰 짐들을 차곡차곡 돗자리 한 쪽으로 몰았다. 망원경도 차에서 뺀 후 눕힌 채로 두었다. 돗자리는 큰 편이었기 때문에 짐들이 올라앉아있는 부분 외에도 한구석에 누울만한 공간이 충분했다.


장을 봐둔 가방을 뒤적여 레토르트 컵밥 하나를 꺼냈다. 전기포트에 물을 올린 후 컵밥용기를 넣고 데웠다. 데우는 동안 하늘을 슬쩍 올려다 봤다. 슬며시 해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관측을 하지 않기에는 구름한점 없는, 그런 아까운 하늘이다. 그래도, 내가 결정한 일이다.

돗자리에 앉아서 밥을 입에 넣었다. 산에서 식사를 하면 뭘 먹든 맛있다. 태블릿을 세우고 지난번 보다만 별 관측 영상을 재생하려다가, 아예 다른 영상을 눌렀다. 굳이 미간을 찌푸려가며 볼 필요 없는, TV 예능 영상을 틀었다.

오늘은 별이랑 상관없이 그저 산에서 자러 온 한명의 자연인이자 나그네로서 하루를 보내자.

미련을 가질 행동을 하지 말자.

낮잠을 길게 잔, 오전의 나 스스로를 탓할 건덕지를 더는 만들지 말자.


숨이 막힐 정도로 가쁘게 살아온 건 아니다. 그저 평범하게 남들처럼 해야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다. 갑작스럽게 해야하는 일을 안해도 된다,고 주어지는 시간은 거의 없다. 오히려 갑작스럽게 해야하는 일의 양이 늘어나는 경우면 모를까.


그런 하루하루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오히려 갑작스레 '아무것도 안해도 돼'라는 명제가 주어지는 날이 있었다면, 어떻게 보냈을까. 더 난감해하고 혼란스러워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렇게 단 한번도, 일상의 공백에 대해 고려해 본적도, 결정권도 없는 상태로 살아왔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회사원에게는 딱 적정한 수준의 안락이 제공된다. 의무와 책임은 당연한 관성으로 주어진다. 해야할 일이 비게 될 경우, 다른 일을 찾아야만 한다. 그것이 월급의 이유다. 그렇게 수년을 보냈고 몸과 정신은 '뭐라도 해야 하는데'라는 루틴에 절여져있다.

단 한번도, '하지 말자'를 결정할 수 있도록 몸과 정신이 움직여본 적은 없다.

숟가락으로 다시 밥을 한숟갈 입에 넣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밥을 씹었다. 밥 알맹이 하나하나와 밥알에 벤 양념 한조각들까지 혀와 이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밥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 이렇게 입 안에서 다채롭게 퍼져나가는 음식이었다니.


해가 떨어졌다. 퇴사하면서 선물받은 조명을 켰다. 이 조명 또한 관측이 시작되면 불을 아주 작게 줄이거나 끄곤 했다. 조명 자체를 관찰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자 조명이 자세히 보였다.

이 조명은 그저그런 랜턴이 아니었다. 심플하면서도 오브제스러운 디자인이 며칠만에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불빛이 아무렇게나 환하게 나가지도 않았고, 어쭙잖게 힘없지도 않았다. 은은하면서도 꽤 멀게 빛은 퍼져나갔다. 조명을 멍하니 응시하자 빛이 소리처럼 들려왔다. 잔잔한 파도소리처럼, 빛은 산 속에서 선선하게 일렁였다.


나는 계속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조명 가까이서 책을 펼쳐보기도 했고, 휴대폰으로 뉴스를 검색해보기도 했다. 음악을 틀었다. 음악은 조명과 어우러져 돗자리 주변부터 먼 곳까지 다시 살살 흘러나갔다. 소재를 알 수 없는 산 속의 자작대는 소리가 음악과 조명에 함께 섞였다.

차 주변을 돌며 스트레칭도 하고 휘파람도 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산 속은 편안했다. 소화가 좀 된 듯 싶었을 때, 나는 돗자리에 살며시 누워보았다.



그때였다. 수만개의 별들이 그대로 쏟아져내렸다. 장대비가 내리치듯 별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의 위치에서 내가 있는 땅까지 내리 꽂혔다.

"..아!"

분명 매일 망원경으로 보던 그 별들이다. 그 별들이 렌즈를 통하지 않고, 누워있는 나그네의 얼굴로 우수수 떨어진다.


손을 하늘로 뻗어보았다. 별은 잡히지 않고 그대로 손가락 사이를 스쳐 눈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별은 그대로 하늘에 있었고, 하늘에 그 별이 있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또 눈으로 떨어졌다.


북극성을 찾으려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냥, 하늘 전체를 보기로 했다. 해가 떠 있던 하늘보다 밝았다. 소박하게 화려했다. 별들은 멈춰 있었지만 나는 하늘로 빠르게 빨려들어갔다. 단언컨대 돗자리에서 몸이 살짝 하늘로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별들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시야 끄트머리에서는 조명의 붉고 은은한 빛 한조각이 보일듯 말듯 들어왔다. 귀에는 틀어놓은 음악과 밤 산의 소리가 들릴듯 말듯 맴돌았다.


한참을 돗자리 위에 누워서 별을 받았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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