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인석 Sep 25. 2023

08 막강한 하드 파워로부터(2)


개인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출발하는 


 내가 기억하는 초등학교 3, 4학년 무렵, 신문 1면은 하루가 멀다 하고 큰 폰트의 제목이 온갖 위험을 알렸다. 어제는 어떤 기업이, 오늘은 어떤 은행이 부도가 났다는 타이틀로 반복됐다. IMF사태는 한국전쟁 이래로 단 한 번도 꺾인 적 없었던 한국사회의 자신감에 찬물을 끼얹었다. 


 거시경제가 이럴진대 개개인이 멀쩡할리 없다. 정리해고가 쏟아졌고 가장들의 우울증과 알콜 중독, 자살은 기본옵션처럼 따라붙었다. IMF가 뭔지도 모르는 초등학생이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사건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보였다'라고 표현했다. 

 솔직히 말하면 신문지면상에서 보이는 기사와 뉴스에서 매번 큰일 났다고 말하는 앵커의 표정 말고는 직접 '느끼진'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았던 곳, 울산시 동구는 엄밀히 말하면 호황이었다. 주민들 대부분이 현대중공업 임직원이거나 그 가족이었고, 지역 자체가 현대중공업 경기에 좌우되는 특이한 동네였다. 환율이 낮아지다 보니 매출액이 커지는 기이한 현상이 생겼다. 수주잔량도 충분했다. IMF사태가 터널을 거의 통과한 후, 그 시절을 돌아보면서 '울산시 동구는 섬 같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IMF시기(1999년) 현대중공업에서 수주한 LNG선(출처 : HD현대중공업)


 이번 편의 이야기는 모든 조선업을 대변하진 않을 수도 있다. 지난 편 말미에 이야기했듯 개인적인 경험을 붙여서 설명할 것이고, 이 개인적인 경험 또한 현재가 아닌 과거의 이야기이다 보니 완벽한 재현이 아니라 다소 빛이 바래거나 혹은 미화된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해보려 한다.




HD현대중공업의 전신, 유년시절에 느낀 현대중공업


 앞에서 말했듯 유년시절의 현대중공업은 울산시 동구에서 절대적인 회사였다. 기간으로는 1990년대 중 후반이다. 초등학교(입학은 국민학교로 했다.) 1, 2학년 무렵 학교에서 비상연락망을 나눠주었다. 휴대폰이 보급되지 않은 시기의 비상연락망에는 40명 가까운 학급 구성원 이름과 집 전화번호가 표시되어 있었고, 가장 오른쪽 칸에는 부모님의 직장이 적혀 있었다.

 생생히 기억한다. 30명이 넘는 친구들의 칸이 '현대중공업'으로 적혀있었다. 나머지 10개 미만의 칸에는 '현대자동차' 혹은 다른 업종이었다. 이 기억을 떠올리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대학생활을 위해 울산을 떠나고 서울과 수도권에서 생활하면서, 내가 받았던 그 비상연락망의 부모님 직업 칸이 기이하다는 걸 그제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급의 절반을 훨씬 넘는 친구들이, 같은 회사에 재직 중인 부모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울산을 떠나고서야 인지하게 된 것이다. 오히려 어릴 때의 나는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나머지 열명 미만의 친구들을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 문화시설

현대예술관 전경 (출처 : HD현대중공업)

 조선업 불황기가 찾아오기 전인 2010년대 초반까지, 울산시 동구의 '예술회관'은 무려 일곱 개에 달했다. 예술회관은 명칭이 갖는 공공의 분위기와 다르게 모두 현대중공업에서 마련한 것이었다.


 조선업 불황기가 찾아온 후 예술회관들 개수가 축소되었고 지금은 두 개의 예술회관만 남았다. 그러나 이 두 개만으로도 울산 동구 주민들이 누릴 수 있는 문화예술적 혜택은 상당하다. 울산시 동구는 지리적인 한계가 큰 위치이다. 그러나 현대예술관의 존재로 인해 전국적으로 봤을 때도 수준 높은 공연들을 유치해오고 있다. 시설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용 단가는 서울이나 수도권에 비해 저렴한 수준이다.


 기업의 존재 목적이 '이윤추구'라는 당연한 논리를 감안할 때, 이 정도 수준의 문화시설을 하나의 기업이 유치하고 유지한다는 것은 '굳이?'라는 물음표를 남기기 충분하다.


울산시 동구의 지도. 오른쪽 꼬리처럼 생긴 반도가 동구이다. 빨간 체크로 표시한 부분이 동구 밖으로 나가는 다섯 개의 길이다.(지도 출처 : 네이버지도)

 울산시 동구의 지도를 보자. 

 동구는 울산 중심부와도 상당한 거리가 떨어져 있을뿐더러, 동구 밖으로 나가기 위한 길조차 몇 개 없다. 주민 대부분이 현대중공업과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와 같은 시설 유치는 근로자들의 생활 만족도에 큰 부분을 기여했을 것이다.


 나 또한 어린 시절 한마음회관과 현대예술관을 매우 자주 갔었다. 스케이트를 배우기도 했고, 영화를 보거나 식사를 할 때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많은 주민들은 자연스레 문화적 편의를 누릴 수 있었고 현대중공업이라는 기업에 대해 갖는 이미지도 긍정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 백화점

 

 현대백화점은 서울을 제외하면 어떤 대도시에도 한 개 넘는 지점을 두지 않는다. 인구 300만 안팎의 부산이나 대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상하게 울산에만 유독 현대백화점은 두 지점이 위치해 있다. 


현대백화점 울산동구점(출처 : 더현대 홈페이지)

 현대백화점 동구점은 철저히 현대중공업을 위해 지어졌다. 앞에서도 설명한 울산 동구의 지리적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방안이었을 것이다. 근로자들의 복리 후생의 일부였고, 사실 현대중공업이 들어서기 전 이 지역은 별다른 편의시설이 없기도 했다. 현대백화점 울산동구점은 현대백화점 1호점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


 비록 현대백화점의 다른 지점들에 비해 규모가 작지만, 메이저 백화점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다. 울산 동구에 다른 대형마트가 들어오기 전까지 현대백화점 동구점은 주민들의 좋은 소비처이자 문화센터 역할을 겸했다. 현대중공업에서 번 돈은 현대백화점에서 쓰여지는, 기업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영리한 순환구조를 만들게 된 셈이다.


- 호텔

 

 마찬가지로 현대중공업 정문 맞은편에 높게 위치한 호텔현대 바이 라한 울산은 현대중공업에 업무차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지어졌다. 현대중공업의 주요 고객은 거대 선주사이고, 이들이 선박 계약을 위해 방문한다면 방문자 한 명 한 명이 몇백억, 몇천억을 좌우하게 된다. 이들을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위상의 호텔이 필요했다. 


호텔현대(현 호텔현대 바이 라한 울산)는 울산 동구의 규모를 감안하면 좀 과하다 싶다.(이미지 출처 : 호텔패스)

 사실 현대중공업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울산 동구에 위치한 호텔현대는 다소 뜬금없고 과한 시설이라고 느끼기 마련이다. 인구 30만의 작은 반도(거의 섬에 가까운)에 5성급 호텔(매각된 이후 4성으로 표기되고 있다.)이라니 말이다.



- 의료시설


 울산대학교병원은 울산에 있는 유일한 상급 종합병원이다. 내가 유년시절에 기억하는 울산대학교병원의 원래 이름은 '해성병원'이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 전 해성병원의 원래 이름은 '현대조선 부속병원'이었다. 

 

현대조선 부속병원(이미지 출처 : 울산매일)

 현대중공업 정문 맞은편에 위치한 이 병원은 이름 그대로 조선소 노동자들의 의료 편의를 위해 지어졌다. 그리고 규모가 점점 커져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비록 '대학병원'이지만 고 정주영 회장의 아산재단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의료시설이다. 

 

 30만 명 정도의 울산 동구 주민들은 웬만한 광역시급 규모의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의료편의를 울산대학교병원 덕에 누릴 수 있다. 


상급종합병원인 현재의 울산대학교병원(이미지 출처 : 울산대학교병원)



 개인적 경험의 회상으로 진행되다보니 분량 조절이 어려웠다. 다음 편에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마무리한 후, 최근 조선업황과 소프트 파워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09 막강한 하드 파워로부터(3)'에서 계속)

매거진의 이전글 07 막강한 하드 파워로부터(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