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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Jun 23. 2020

거실 불 끄기

TEXTIST PROJECT SE

 조명이 어두운 거실을 바라보는 건 여전히 두렵다. 


 거실은 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다. 창은 크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햇볕 공급의 대부분을 담당한다. 저녁이 찾아오면 자연스레 거실은 인공적인 조명을 필요로 한다. 큰 창은 더 이상 공급할 자연광을 얻지 못한다. 인간들은 자연스레 커튼을 친다. 그리고 거실 천장에 달려있는 인공조명을 켜서 필요한 빛을 다른 방법으로 공급한다. 

 나는 거실을 어둡게 두지 못한다. 불 꺼진 거실을 바라보면 어떤 순간이 떠올라서 숨이 막힌다. 몸서리가 쳐진다. 아내는 아직 이런 나를 완전히 이해하진 못한다. 고통의 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고통의 기억이 침전되어 두려움으로 남았다. 불 꺼진 거실은 고통의 기억을 재생시켜준다. 황급히 나는 불을 켠다. 

 나는 지금부터 비루한 고통의 순간을 글로 늘어놓는다.


 수년 전, 나는 멀쩡히 회사를 다니며 2년 차를 지나 보내고 있었다. 이름을 대면 알만한 대기업에 어렵사리 합격했고, 그 자부심과 성취감으로 충족됐던 기간들이다. 무서울 게 없었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가난하지도 않았다. 취업 하나만으로 부유하는 또래 동기나 선후배들에 비해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했다. 그 맛에 2년여를 보냈다. 직장에서는 서글서글한 막내로 예쁨 받았다. 가족들의 자부심과 기대도 높았다. 무겁기보다는 상쾌했다. 수년간의 학창 시절과 성실했던 대학생활, 힘겨웠던 군생활 모두를 보상받는 느낌의 그 2년. 

 뉴스에서는 연일 하루가 멀다 하고 "청년의 취업난은.."으로 시작하는 멘트들을 띄웠다. 우리 세대가 겪는 어려움이 커질수록 옹졸한 나의 자부심은 더더욱 치솟던 때다. 그렇게 어려운 시기에 남들 모두 부러워하는 직장의 문턱을 넘었다는 그 진부한 한 가지 사실만으로 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성취감에 도취된 채 흘려보내던 시절, 몸이 조금씩 아파왔다. 지금도 원인은 모른다. 복통과 설사가 종종 있었다. 장염이겠거니 했다. 상승감에 젖어 사느라 그 아픔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픔은 수개월 지속됐지만 젊음을 믿었다. 

 변기가 피로 차기 시작했다. 적어도 통증이 오래갈 때, 이미 알았어야 했다. 하지만 피를 보기 시작한 뒤로도 약국에 들러 치질약이나 샀다. 이토록 젊은 나는 오만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조잡한 '신체의 자정능력' 따위를 신뢰했다. '이젠 진짜 병원이라도 가볼까' 했을 때, 나는 이미 회사를 나갈 수 없었다.

 휴가를 냈다. 짧을 거라 생각했다. 고향에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 행 지하철을 탔다. 이상했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눈 앞이 희미했다.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는 게 느껴졌다. 지하철은 앉을자리가 없었다. 휘청거리는 걸 느꼈다. 앉아있던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나를 봤다. 누군가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사람들은 다시 눈을 아래로 내렸다. 서울역까지는 멀었다.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쓰러지고 싶었는데 한편으로는 '한 정거장만..'이라는 생각으로 참았다. 흉부 아래쪽이 불타는 듯 아팠다. 어금니가 내려앉을 정도로 깨물으며 서울역에 도착했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인생 가장 힘든 지하철이었다.


 고향의 동네 병원에 갔다. 몇 시간짜리 링거를 맞았다. 진료비와 주사비가 6만 몇천 원 나왔다. 값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냥 안 아팠으면 했다. 금방 낫겠거니 했다.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에서 금의환향을 즐기길 바랐는데, 몸이 견디질 못했다. 왜 아픈지도 몰랐다. 병원은 장염이라고만 했다. 치료 후 집에 돌아와도 몸은 이상했다. 그냥 그렇게 고향 집에서 아픈 잠에 들었다. 

 통증에 깼을 때는 새벽 4~5시경이었다. 그 시곗바늘의 모습을 기억한다. 아파서 깼다. 복부를 칼로 난도질당한 느낌이었다. 입이 자꾸 말랐는데 물을 아무리 마셔도 혀의 가뭄은 흩어지질 않았다. 찬 물을 마시면 다시 화살이 하나씩 더 복부에 꽂히는 것 같아서 따뜻한 물을 후후 불어 마셨다. 거실 소파에 널브러지듯 있었다. 거실은 깜깜했다. 배를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당연히 거실은 수 시간 전부터 쭈욱 어두웠을 텐데, 그때서야 순간적으로 어둠이 느껴졌다. 어둠이 갑자기 내 목을 졸랐다. 그 느낌은 수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픔을 비집고 나온 어두운 거실의 묵직함이 다가오자 목구멍으로 찬 울음이 넘어오려 했다. 울음을 다시 목 뒤로 넘겼다. 벽 뒤의 방에서 부모님이 주무시고 계셨다. 그 문 틈새로 불빛이 새어나갈까 봐 거실 불을 켜지 못했다. 나는 아침이 올 때까지 어두움을 이기지 못하고, 그렇다고 두려움에 맞서 이기지도 못한 채, 벌벌 떨며 그 숨 막히는 공포를 그대로 맞다가 해를 봤다.


 뒤의 이야기는 또다시 진부하다. 

 큰 병원으로 옮겨지고도 차도가 없었다. 희귀병 같다는 진단을 받고 큰 병원보다 더 큰 병원으로 옮겨졌다. 결국엔 아예 가장 큰 병원으로 다시 옮겨졌다. 고향에서 다시 서울까지 구급차를 타고 이동했다. 부모님은 구급차에 50만 원을 지불했다. 상경의 아이러니. 몸을 낫게 하려고 서울에서 가장 먼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몸을 낫게 하기 위해 다시 가장 먼 서울로 돌아왔다. 가장 큰 병원은 한동안 병세를 잡지 못했다. 입원실의 일상은 반복됐다. 체중을 재고 피검사를 하고 혈압을 잰다. 약은 계속 투여된다. 통증은 그냥저냥 쭉 지속됐다. 그냥 평범하게 지속적으로 칼로 찌르는 그 느낌. 분명 고통스러운데 초단위로 반복돼서 체념하게 되는 그런 통증. 식사는 금지됐고 물도 먹지 못했다. 몸무게는 금세 줄었다. 입원하고 1주 조금 더 지나고 체중계의 바늘은 52를 가리켰다. 20이라는 숫자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치료는 차도가 없었고 가족 모두의 절망을 병상에서 대면하며 시간을 보냈다. 병원에서는 나의 장을 절제할지 말지를 두고 우왕좌왕했다. 수술의가 잘라야 한다고 겁을 줬다. 나는 자르고 살아가야 할 날들에 겁을 냈다. 주치의는 수술의의 겁과 환자의 겁을 동시에 이해했다. 그래서 주치의는 장을 자르는 결정을 하지 못했다. 절제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절제를 안 한 것도 아닌 날들이 연장됐다. 같은 약들을 투여하며 경과만 지켜봤다. 마지막 수단으로 의사는 면역억제제라는 무서운 이름의 처방을 시도했다. 


 병원에서의 두 달 가까운 시간이다. 수년이 지난 지금 나는 상당히 건강하다. 진부한 이야기의 결말은 식상하지만 해피엔딩이다. 그래도 두 달에 한 번씩 그 가장 큰 병원을 방문한다. 무서운 이름의 처방은 수 년동안 2개월을 주기로 투여된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이제 아프지 않다. 병원은 소풍처럼 갈 수 있다. 내 자부심이던 명함 속의 회사로 복귀했다. 많은 위로와 축하를 받았다. 다 나은 거라고 생각했다.

 거실에 사람이 있으면 자연스레 불을 켜놓는다. 어느 날 별생각 없이 어두워지는 거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불을 끈 채 앉아 있었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거실이 어둡다는 걸 알고 말았다. 숨이 막혀온 건 바로 그 순간. 큰 바위가 목을 짓눌렀다. 나는 수년 전 어두웠던 거실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잊지 못했다는 사실을 수년이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칼과 화살이 난도질하던 장의 위치를 기억한다. 불 꺼진 거실은 고통의 기억을 다시 재생시켜주고 있었는데, 목구멍을 넘어오던 차갑고 먹먹한 울음까지 생생히 돌아왔다. 나는 너무 두려워서 거실 불로 힘겹게 손을 뻗었다. 숨 막히는 느낌 때문에 손은 느리게 움직였고 가까스로 전원을 올렸다. 밝아진 거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둠을 물리쳤는데, 나는 여전히 숨이 차서 헉헉대고 있었다. 

어두운 거실은 빛의 부재만으로 고향집 거실에서 배를 움켜쥐고 있던 시간을 꺼냈다. 구급차를 타고 서울로 실려오던 기억과 입원실에서 별다른 대안 없이 통증을 삼키던 끔찍한 나날들을 꺼냈다. 두 달 조금 안 되는, 살아온 어느 날보다 더디게 흘렀던 순간들 전체가 하나의 큰 덩어리가 되었다. 거실의 어두움이라는 동일한 플랫폼을 통해 그 덩어리가 심장에 던져졌다. 안 아픈 나는, 안 아픈 줄 알았던 나는, 그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픔을 맞았다. 


 이제 그때보다 나이가 많아졌다. 결혼도 했고 새 가정을 이뤘다. 넓어진 집에서 혼자 있을 때면 재밌게 보낸다. 다만 혼자 있어도 거실 불은 항상 환하게 켜 둔다. 어두운 거실은 기억 속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을 언제라도 스크린에 재생시켜줄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다. 전기세를 아끼자는 명분으로 거실 불을 어둡게 해 놓으려 노력해보기도 했다. 항상 실패했다. 혀의 가뭄을 전혀 해소하지 못했던 따뜻한 보리차에 피맛이 섞여 느껴지는 걸 인지하고는 황급히 다시 불을 켰다. 이젠 거실을 어둡게 두려는 도전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건강한데 두려움은 유효하다. 

 아프고 나서의 삶은 조금 움츠러들었다. 더 이상 자아도취는 없고, 명함에 기댄 자부심은 사라졌다. 그저 나는 회사원으로 남았다. 사실 그 정도도 감사한 타이틀이다. 잘못하면 더 먼 곳으로 떠났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 아픔은 오만한 나를 향해 많이 아프게 휘둘러진 회초리였을까 싶기도 하다. 이제 신체의 고통은 더 이상 없어서 회초리는 겁나지 않다,고 자만할 때 즈음이면 어둑어둑해지고 거실의 불은 켜달라고 신호를 준다. 거실 불 꺼놓기를 실패하며 고통의 기억을 마주하기 전에 황급히 불을 켠다. 내 자만은 어둠과 함께 물러간다. 

 오늘도, 어둠이 다 내려앉기도 전에 거실 불을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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