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교육의 가장 피크 타임은 초등학생 시기인 것 같다. 초등학생 시기에 2번의 단계를 잘 거쳐야지만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싱가포르는 초등학교 때부터 로컬 학교의 순위가 정해지는 곳이다. 그래서 흔히 top 10 스쿨이라고 하는 곳에 보내려고 유치원 때부터 학교 근처로 이사해서 사는 경우도 많고 좋은 학교 근처는 집값도 꽤나 비싸다.
첫 번째 관문은 3학년 말에 실시하는 GEP(Gifted Education Programme) 시험인데 교육부(MOE, Ministry of Education) 주관으로 초등학생 3학년이 모두 보는 시험이다. 이 시험은 말 그대로 영재선발고사이다. 시험 과목은 영어, 수학 두 과목만 보는데 어느 한쪽만 잘해도 소용이 없고 두 과목 잘해야 해서 문과, 이과 모두에서 뛰어난 아이가 선발이 된다. 시험은 1차, 2차 두 번으로 보고 보통 초등 6학년부터 중 1, 2 과정까지의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미리 선행으로 준비를 시키는 부모들도 있다고 하지만 시험 자체가 영재성을 가진 아이를 뽑게 만들어져 있어서 그렇게 뽑히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한다. GEP에 뽑히면 싱가포르 정부에서 키우는 영재이기 때문에 대학까지 레드카펫을 밟고 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두 번째 관문은 6학년 때 보는 PSLE(Primary School Leaving Examination)로 아이들이 맞이하는 인생의 첫 시험이라고 볼 수 있다. 시험 과목은 영어, 수학, 과학 그리고 제2언어(MTL, Mother Tongue Language)라고 하는 중국어나 다른 외국어로 총 4과목이다. 이 PSLE 점수로 각 학교의 커트라인 점수(cut-off points)에 맞춰서 6순위까지 지망하게 된다. 커트라인 점수 이상으로 지원해도 커트라인 점수가 매년 1~2점 정도 변동이 있기도 해서 어느 학교를 갈지는 교육부만 알고 있다. 높은 점수를 받으면 IP(Intergrated Programme) 학교에 갈 수 있는데 IP 학교는 6년 과정으로 고등학교 진학시험을 보지 않고 자동으로 인문계(JC, Junior College) 학교로 진학이 가능하다. (중학교 이후 과정은 '3개 국어 하는 아이 키우기 (3)'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초등학생 때는 언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수학, 과학 같은 과목들도 중요하기 때문에 언어에 집중을 하기 어려운 시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학교에서 영어와 중국어 수업을 계속 듣고 공부하지만 아이의 두 언어 수준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중국어는 학교와 학원 외는 중국어 책도 안 읽고 전혀 노출이 없었기에 영어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동안 한국어는 집에서만 쓰는 언어가 되어버렸다.
5학년이 되면서 아이는 부쩍 중국어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거의 경기 현상이라고 할 정도로 중국어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글자 하나일 때와 같은 글자라 해도 글자 두 개가 되면 뜻이 달라지는 중국어는 무조건 암기였다. 왜 그리 우리 선조들이 천자문, 사서삼경을 주야장천 외웠는지가 이해가 될 정도였다. 안 그래도 싫어하는 과목은 공부를 등한시하는 애인 데다가 보통의 중국어 선생님들은 무서우니 수업이 재미없고, 뭐 결론은 중국어 점수는 바닥을 찍고 있었다. 그래도 중국어에 흥미를 좀 더 주고자 중국 만화를 찾아서도 보여주고 했지만 보라니까 보는 거지 본인이 찾아서 즐겨보지 않으니 지속되기는 어려웠다. 고학년이 되면서는 PLSE를 슬슬 준비해야 했다. 듣기, 읽기, 쓰기는 시험 때 바짝 시키면 어느 정도 점수라도 나왔는데 말하기는 단기간에 늘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6학년 때 볼 PSLE 시험에서 중국어 말하기 점수가 형편없을까 봐 말하기만 온라인으로 30분씩 주 2회 수업을 시켰다. PSLE 시험을 볼 때까지 2년 동안 말이다. 선생님은 아이 성향에 맞게 부드럽고 친절한 선생님이어야 했고 선생님이 중국에 계셨지만 싱가포르에서 살아서 싱가포르 교육을 알고 있는 선생님이어야 했다. 성향을 고려하니 아이는 이 수업은 싫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PSLE 중국어 성적 중에 말하기 점수가 제일 높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아이의 영어 발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유치원 때까지는 CD로 미국 영어, 영국 영어를 들려줘서 나름 발음이 괜찮았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니 친구들의 영어 발음을 따라 하기 시작하는 거였다. 우리에겐 콩글리시가 있듯이 여기에는 현지 사람들이 쓰는 싱글리시(Singlish)가 있다. 그런데 유난히 초등 저학년 때는 모든 아이들이 싱글리시 악센트, 싱글리시 단어로 말한다. 그러니 우리 아이도 자연스레 따라서 사용하였고 저학년 때는 싱가포르 애인지 한국 애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싱글리시를 구사했다. 다행히 고학년이 되면서 덜 썼지만 지금도 상대가 싱글리시 악센트로 말하면 본인도 그렇게 맞춰준다. 그냥 부산 사투리 하던 사람이 서울 와서 살다가 부산 사람 만나면 부산 사투리 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면서는 싱글리시를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학교 분위기가 정확하고 바른 영어(proper English)를 요구하니 또 자연스레 따라갔던 것 같다. 그래서 영어 발음은 어느 특정 나라-미국이나 영국-발음이 좋고 싱가포르 발음이 별로다라는 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아이가 영어의 사투리라 볼 수 있는 싱글리시도 구사할 수 있는 아이로 자랐다고 생각한다.
저학년 때는 말하기 시험을 쇼앤텔(Show and tell)로 보는데 미리 주제를 정해서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예를 들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물건에 대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가지고 가서 친구들에게 인형을 보여주고 소개하면서 왜 이 인형이 소중한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리 뭐라고 말할지 시나리오를 쓰고 연습을 시켜야 한다. 아무리 본인의 내용을 말하는 거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암기와 연습이 안 되면 있으면 떨려서 하고 싶었던 말을 다 못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쇼앤텔 시간을 아주 적절하게 활용한 적이 있었다. 3학년 때 짓궂은 남자애가 놀려서 아이가 기분이 안 좋았었다. 그래서 쇼앤텔 발표 자료에 살짝 넣어서 나를 가끔 놀리는 애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너 같은(Like YOU)' 아이라고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그 남자애를 가리키라고 했다. 그랬더니 지적질을 받은 남자아이는 깜짝 놀라며 얼굴이 빨개졌고 이후로 그 남자애는 더는 괴롭히지 않았다. (중국어도 쇼앤텔 시험이 있다.)
좋아하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반복학습 하시는 성향상 아이는 '해리포터 시리즈'에 빠져서 몇 년 동안 이 시리즈를 반복해서 읽었다. 엄마 몰래 가방에 숨겨가고 학교 쉬는 시간, 학원 쉬는 시간에 읽어서 본인 말로는 한 100번은 읽었다고 한다. 그래도 판타지물만 읽게 할 수는 없어서 뉴베리 수상작, 칼데콧 수상작 같은 책들도 읽게 했다. 하지만 고학년이 되면서는 본인 취향에 따라 책을 선정하기 시작해서 점점 자율에 맡기게 되었다.
영어와 중국어의 노출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한국어의 속도가 더뎌졌다. 집에서는 무조건 한국어로 얘기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엄마랑 하는 얘기는 항상 "오늘 학교 어땠니?", "숙제했니?" 같은 뻔한 얘기들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전까지는 안 보던 케이블을 신청해서 보기 시작했다. 케이블 채널 중에는 KBS World라고 해서 KBS의 드라마나 예능 프로에 각국의 자막을 입혀서 보내는 채널이 있었다. 드라마는 2주~한 달 정도 늦게 볼 수 있었지만 뉴스의 경우는 생방송으로 볼 수 있어서 꽤 괜찮았다. KBS 특성상 아이들이 보기에 문제 될 프로그램이 없어서 아이와 같이 보기에도 딱이었다. 그리고 아래에 자막도 있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자막으로도 해결이 되니 아이의 한국어 듣기와 한국 문화 이해하는데 무척이나 도움이 됐다고 본다. 하지만 한국어 듣기는 텔레비전으로 해결을 한다고 하지만 말하기는 어떻게 해야 하나 했는데, 다행히 애가 3명인 한국 가족이 이사를 와서 그 남매들 사이에서 한국어를 쓰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연습할 수 있었다. 그리고 1년에 한두 번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얼굴도 보고 한국어도 듣고 말할 수 있게 했다. 아무리 해외에 살더라도 우린 한국 사람이니까.
3개 이상의 언어를 동시에 같은 레벨로 끌어올리는 건 내 경험치로는 힘든 것 같다. 하지만 비중을 달리하면 가능하다. 학교 공부에서 우선순위가 영어였기에 4학년 때까지는 언어 노출의 60% 이상은 영어로 맞추고 나머지 중국어 20%, 한국어 20%로 했었다. 하지만 PSLE 시험이 가까워져 오면서는 영어 50%, 중국어 40%, 한국어 10% 정도로 언어 노출에 변화를 줬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특정 언어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몰아서 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3개 국어라고는 해도 첫 번째로 언어별로 그 수준 차이가 나고, 두 번째로는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의 각 영역별로 차이가 나긴 한다. 언어별 수준 차이는 모든 영역에서 영어가 한국어와 중국어를 능가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차이가 난다. 하지만 한국어와 중국어만을 놓고 비교한다면, 말하기와 듣기는 한국어가, 읽기와 쓰기는 중국어가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언어환경과 언어학습에서 비롯된 결과라 생각이 든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어를 안 좋아하는 아이의 특성상 향후 '영어 > 한국어 > 중국어' 순으로 될 거라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