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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도 Aug 23. 2023

틱톡과 멋진 신세계

'딱 만 보다 자야지'


오늘도 눕기 전 다짐하지만, 어느새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 새벽이 되어버린다. 그만 봐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손가락을 멈출 수 없다. 다음날 출근길에 퀭 해진 채 '오늘만 어떻게든 넘기고 퇴근하면 진짜 무조건 빨리 자러가야지' 마음먹지만 언제나 결과는 똑같다.


틱톡, 쇼츠, 릴스의 숏폼 콘텐츠에 중독되어 버린 것이다.



미래의 계급사회


몇 년 전, 아주 놀라운 기사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미래에는 IT 기업을 정점으로 새로운 계급사회가 펼쳐지며, IT 플랫폼을 독점한 극소수만이 지배계급이 되고 나머지 99.997%는 플랫폼에 종속되어 인공지능 로봇과 힘겨운 일자리 경쟁을 하는 피지배계층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였다. ("AI권력이 '초양극화사회' 만든다", 매일경제, 2017년 10월 23일)


옆 반 친구도, 경쟁사 직원도, 외국인 노동자도 아닌 미천한 AI로봇과 일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99.997%'라는 숫자였다. 연구 결과를 홍보하기 위한 자극적인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이라고 믿고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이고 절망적인 비율이었다.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플랫폼 소유주들이 새로운 카스트 제도의 브라만 계급이 되리라는 전망까지는 어느정도 동의가 가능하더라도, 저렇게 적은 인원이 절대 다수인 수드라 계급의 불만을 잠재우고 사회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연구진들은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등 인류사에 셀 수 없이 기록된 피지배계급의 저항과 봉기를 배우지 않은 것일까. (공대 연구팀이라니 아예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다)



지배 계급이 사회의 안정을 위해 사용하는 세 가지 기술


철학자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지배 계급이 피지배 계급을 다루기 위해 사용하는 세 가지 기술을 거론한다.


최초의 방법폭력이다. 물리적 수단으로 신체를 고문하고 학대하고 구부러뜨려 지배 질서에 순응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폭력을 겪은 민중들이 분노하고 지배 계급에게 적개심을 가지게 되어 곧 엄청난 저항이 발생한다.


폭력에 대한 저항을 경험한 지배 계급은 다음으로 표상을 활용한다. 정권의 정통성, 집단의 우수성, 법률의 공정성 등을 강조하고 듣기만 해도 울컥하는 노래와 보기만 해도 가슴 떨리는 상징을 각인시키 노력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뭔가 만족스럽지 않다. 교장 선생님이 감동적인 훈화 말씀(또는 가스라이팅)을 하시는데 자꾸  산 바라보는 학생들이 있어 눈에 거슬린다. 이노무 시키들. 너희들의 영혼 속까지 파고들고야 말겠다. 규율 기술이 활용된다.


"이제 강화되고 유포되는 것은 더 이상 표상의 작용이 아니라 강제권의 형식들이고 또한 적용되고 반복되는 구속의 도식들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기호가 아니라 훈련이다. 예컨대 시간표, 일과시간 할당표, 의무적인 운동, 규칙적인 활동, 개별적 명상, 공동작업, 정숙, 근면, 존경심, 좋은 습관이 그렇다."


끊임없는 반복과 숙달. 파블로프의 개 마냥 질서가 요구하는 행동을 눈감고도 할 수 있을만큼 내 몸 구석구석 세포 하나하나에 박아넣는다. 그리고 판옵티콘을 통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열하게 만들고 내면에 24시간 풀 타임 근무하는 감시자를 심는다. 이제 지배 계급이 멀리 바캉스를 떠나있어도, 피지배 계급은 질서를 어기는 일에 스스로 온몸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지경에 이른다.


규율은 주로 군대, 감옥에서 사용되는 통제 방식을 전 사회로 퍼뜨리는 기술이고, 이것이 극대화된 모습이 조지 오웰의 <1984> 묘사되어 있다. 조지 오웰은 스탈린 시대의 공산국가 소련을 보고 공포에 질려 이 작품을 썼으며, 규율 권력에 영혼까지 탈탈 털린 주인공 윈스턴을 통해 피지배 계급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였다.


그런데 현실은 1991오웰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공산국가 소련이 붕괴하였다. 규율을 활용한 통치 기술도 지배 계급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멋진 신세계가 예언한 네 번째 기술


<1984>보다 17년 앞선 1932년에 발표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규율과는 또 다른 통치 기술을 묘사한다. 일종의 우민화(책을 읽다보면 가축화에 좀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기술로, 피지배 계급을 원초적인 반응과 동물적 욕구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헉슬리의 세계정부는 오웰의 빅브라더가 세뇌와 고문, 감시를 통해 박탈하려고 했던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우민화 기술을 통해 아주 효율적으로 제거한다.


인공 수정을 통해서만 탄생하는 멋진 신세계의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계급을 부여받는데, 그들은 각 계급에 어울리는 삶의 태도를 조건반사 교육과 수면 교육을 통해 학습한다. 조건반사 교육이란 예를들어 하층 계급의 아이가 책에 가까이 가려고 할 때마다 시끄러운 소리를 울려 무의식 속에 책에 대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수면 교육은 잠을 자고 있을 때 "알파 계급은 우수하고, 내가 속한 베타 계급은 행복하며, 감마와 델타 계급은 열등하다"와 같은 메시지를 담은 음성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무의식 속에 자신이 속한 계급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고정관념을 심어주는 교육법이다.


이렇게 자라 어른이 된 아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멋진 신세계를 아무 문제도 없이 완벽하게 잘 돌아가는 지상 낙원이라 생각하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가끔 내면 깊은 곳에서 원인 모를 의구심과 반항심, 또 우울감이 찾아올 때가 있는데, 이를 위해 세계정부에서 제공하는 처방이 바로 '소마'라는 알약과 무제한의 성적 유희, 그리고 촉감영화다.


"세계는 이제 안정된 세계야. 인간들은 행복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 있단 말일세. 얻을 수 없는 것은 원하지도 않아. 그들은 잘 살고 있어. 생활이 안정되고 질병도 없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행복하게도 격정이나 노령이란 것을 모르고 살지. 모친이나 부친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않아. 아내라든가 자식이라든가 연인과 같은 격렬한 감정의 대상도 없어. 그들은 조건반사 교육을 받아서 사실상 마땅히 행동해야만 되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없어. 뭔가가 잘못되면 소마가 있지."


소마는 오늘날의 마약, 촉감영화는 4D 포르노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수단을 통해 세계정부는 질서를 이탈하려는 신호를 보이는 구성원들을 순식간에 교정한다. 황홀한 감각 체험을 하는 와중에 그들의 동물적 욕구는 해소되고 다시 아무 문제도 없었던 시절의 유쾌한 기분으로 돌아온다.



나르시시스트가 된 호모 사피엔스


추측하건대 아마 헉슬리는 시골에 놀러갔다가 목장에서 어떠한 불만도 없이 얌전히 풀을 뜯는 젖소들을 보고 영감을 받은 것 같다. 괘씸하다. 우리 인간을 뭘로 보고. 만물의 영장, 위대한 호모 사피엔스를 가축처럼 길들일 수 있다는 발칙한 상상을 하다니.


우리는 동물들과 달리 꿈도 있고, 상상도 하고, 이상을 가질 줄도 알고, 육체적 욕구를 뛰어넘는 좀 더 고차원적인 특별한 무언가를 바라는 존재야! 마약과 포르노 따위로 우리의 고결한 정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마!


하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바보상자' 텔레비전을 통해 헉슬리의 가설이 맞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미래의 지배 계급, 플랫폼 소유주들은 멋진 신세계의 기술을 더 업그레이드 시킬 방법을 찾아낸다. (괜히 0.001%가 아니다) 알고리즘빅데이터 기술에 더해 플랫폼에 영혼을 갈아넣을 준비가 되어있는 크리에이터들(공대 연구진은 플랫폼 스타라 부르는) 모아놓고 뚝딱뚝딱 하더니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그게 뭔데. (우선 진정 좀 하고) 꿈이니 이상이니 추상적으로 말하지말고, 내가 예시를 쫙 보여줄테니까 몇 개만 먼저 골라줘. 그 다음부터는 내가 알아서 네가 꿈꾸는 세상을(아니 그 이상을), 그것도 매번 다른 버전으로 보여줄게.


그리고 놀라운 일이 펼쳐진다. 그들은 우리를 우리 자신 안에 가두는 데 성공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종의 막을 형성하고, 각자의 막에 영상을 투사한다. 철학자 한병철은 <정보의 지배>에서 이러한 막을 '필터 버블'이라 칭하는데, 플랫폼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나의 필터 버블은 내가 좋아하고 나의 신념을 강화하는 정보들로 가득 채워진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각자의 필터 버블 속에서 타인과 분리된 채 영원히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사회의 원자화와 나르시시스화가 심해짐에 따라 우리는 타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다. 또한 공감을 상실한다. 오늘날 모든 각자는 자아를 숭배한다. 누구나 자기를 공연하고 생산한다. 알고리즘을 통한 망의 개인화가 아니라 타인의 사라짐이, 경청 능력의 부재가 민주주의가 처한 위기의 원인이다."


이제 위대한 선동가 레닌, 아니 레닌의 할아버지살아돌아온다 해도 민중을 결집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모두가 물 위에 비친 아름다운 나의 모습을 보며 황홀해하고 있는데 혁명이라니 왠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그렇다면 99.997%는 충분히 실현가능한 숫자란 소리다.



달콤한 꿈


간만의 휴일. 배달음식을 시켜놓고 드러누웠다. 내 손은 또 조건반사적으로 스마트폰을 찾았고, 곧장 숏폼 콘텐츠를 돌린다.


그곳에는 원하고 바라는 모든 것이 다 있다. 나를 쳐다보며 웃어주는 매력적인 이성들. 지치지도 않고 빵빵 터뜨려주는 유쾌한 녀석들. 뒹굴뒹굴 세상 귀여운 동물들과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해주는 아름다운 풍경. 그리고 또 그리고 또. 도무지 지루할 틈 없이 달콤하고 편안하다.


멋진 신세계면 어떻고 또 매트릭스면 어떤가. 현실은 차갑고 괴롭고 고통스러운데. 위대하신 IT 플랫폼의 은혜를 받아 영원히 달콤한 꿈 속에 머물 수 있다면 그게 그냥 행복 아닌가. 잘 모르겠다.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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