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없어도 생각과 취향은 있어

영화 <소공녀>가 묻는 삶의 정답지

by 잇다

여기,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가계부가 있습니다. 3년 차 가사 도우미 미소의 일당은 4만 5천 원. 그녀의 삶을 지탱하는 필수 항목들의 가격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밥: 10000원

약값: 10000원

담배: 한 갑 4,500원 (없으면 불안함)

위스키: 한 잔 12,000원 (없으면 잠을 못 잠)

월세: 인상 통보


계산기를 두드려보니 답이 안 나옵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기호식품인 담배와 위스키를 포기하죠.

의식주(衣食住)는 생존의 기본값이고, 취향은 여유가 있을 때 챙기는 사치니까요. 하지만 미소는 펜을 들어 가장 비싸고 거대한 항목인 에 X표를 칩니다. 그리고 그녀는 과감하게 집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섭니다.


이 황당한 가계부는 우리에게 충격을 줍니다. 그녀에게 위스키 한 잔, 담배 한 갑은 단순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추운 세상에서 자신을 지켜주는 집과 정확히 1:1로 맞먹는 가치를 지닌 생존의 필수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너는 염치가 없어" : 가치관의 충돌



집을 나온 미소는 옛 밴드 멤버들의 집을 전전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가장 아픈 말을 듣게 됩니다. 안정적인 경제력과 집을 가진 친구는 미소를 향해 날 선 비난을 던집니다.


"나는 네가 염치가 없다고 생각해. 집도 없으면서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마시는 게, 그게 말이 되니?"


친구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회적 통념상 집(기본)도 해결하지 못한 채 취향(사치)을 누리는 건 철없는 행동이니까요. 친구에게 미소는 삶의 우선순위가 고장 난 한심한 낙오자로 보였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과연 누가 누구의 삶을 한심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친구에게는 집이 삶의 필수조건이었지만, 미소에게는 취향이 삶의 필수조건이었습니다. 서로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의 무게가 달랐을 뿐, 누구도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친구의 비난은 어쩌면 자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도 평온해 보이는 주인공을 보며 느낀 이질감과 불안의 표현은 아니었을까요?






타의 기준이 곧 나의 기준인 것일까?




우리는 학교에서부터 배웁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의식주라고. 안전한 공간이 확보된 뒤에야 자아실현도 있고 취미도 있는 것이라고요. 이것이 사회가 정한 행복의 표준 순서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믿음에 균열을 냅니다. 안락한 아파트에 살지만 대출금과 시댁의 눈치 때문에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린 친구들과, 텐트에서 자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위스키의 향과 담배 연기 속에서 오롯이 로 존재하는 미소.


미소는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보편적인 절대적 가치 또한, 어쩌면 사회가 만들어낸 하나의 관습일 수 있다는 것을요. 남들이 다 하니까, 그게 안정적이니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게 더 중요해"라고 말하며 관습 대신 자신의 기호를 선택하는 삶. 그것은 미친 짓이 아니라, 또 하나의 존중받아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행복의 농도는 저마다 다르기에



영화는 미소의 삶이 정답이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삶은 춥고, 고단하고, 외롭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대책 없는 삶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합니다. 미소는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했다는 사실입니다.

삶을 대하는 태도와 행복의 농도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누군가는 100평짜리 집에서 안정을 느끼며 살아가고, 누군가는 1평짜리 텐트에서 취향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2026년,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곁눈질하며 정답을 찾으려 합니다. "집은 샀어?", "결혼은 했어?" 하지만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삶에 정해진 정답지는 없다고. 의식주를 선택한 삶도, 취향을 선택한 삶도,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과 누려야 할 행복이 있을 뿐입니다.


집을 포기하고 취향을 산 미소. 그녀의 선택을 마냥 옹호할 수는 없어도, 그녀가 보여준 삶의 태도만큼은 꽤나 근사해 보입니다. 적어도 그녀는 남의 답안지를 베끼지 않고, 자신만의 펜으로 꾹꾹 눌러쓴 자신만의 답안지를 제출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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