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telmen Oct 12. 2017

뭐가 하고 싶어요?

조금 길고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는 그랬다. 행복에는 '자산성 행복'과 '현금 흐름성 행복' 두 종류가 있는 것 같다고. 아주 큰 성취를 이룬 사람은 그 기억으로 발생되는 높은 행복의 이자를 버티는 힘으로 삼지만, 순간순간의 행복과 변화를 끝없이 추구하는.. 그래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두 행복론 중 어느 것 하나가 더 맞거나 옳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유감스럽게도) 후자의 경우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작가는 후에 인터뷰에서 이 행복론에 관해 "삶의 목표를 자꾸 생존으로 만들게 하는 사회지만, 그렇게 놔둬선 안된다. 저항의 시작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일희일비가 특기라서 성취감을 적금처럼 넣어두고 간신히 붙는 이자로 버티는 일은 하기 어렵다. 체질적으로 무료함을 안정감으로 여기며 살 수도 없다. 그렇지만 익숙하고 이미 편할대로 편해진, 예측 가능한 생활을 버리는 것을 단번에 결정할 수는 없었다. 내가 지금 받고 있는 인정과 격려가, 새로 선택하는 것으로 인해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들이 솔직히 아쉬웠다. 다시 새로운 사람과 일에 적응해야 한다는 두려움과 저항감도 앞섰다. 이미 마음이 기울었으면서도 1%의 확신이 부족해 망설였을 때, 새 회사 대표의 한 마디가 날 움직이게 했다. "OOO님이 인생에서 원하는 일을 찾고, 하면서 살기 위해서 회사가 수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번 이직의 변. 새로운 회사 출근을 앞두고 있는 지금, 여전히 유효한 지점이 있다. 사회생활 8년차, 세 번째 퇴사다.


뭐가 되고 싶어요?

TV에 나오는 프로그램 MC나 정당 대변인, 화가, 여행작가, 고고학자... 어린 시절 학교에서 적어내라고 했던 장래희망을 떠올리면 그 꿈의 크기와 종류가 참 다양했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실제 가질 수 있는 직업을 그려보는 일은 참 재미없게도 단편적이다. 점수에 맞춰 신문방송학을 전공으로 하는 대학에 들어갔는데, 첫 수업에 들어온 교수가 기자와 PD 중 진로를 정하라고 했다. 영상 만드는 일이 그림 그리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테마에 따라 여행을 자주 다니거나 유물 발굴의 현장에도 가볼 수 있지 않을까, 언뜻 생각했다. 물론 마음 먹는다고 거저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아니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대학 2학년에 올라가선 사회학, 민속학, 문화비평이론, 비판커뮤니케이션과 같은 타과 수업, 교양 과목을 더 많이 찾아 들으며 독일이라는 나라에 관심이 생겼다. 다른 친구들이 영상 만드는 기술을 배우거나 언론사 논술, 토익 시험 준비를 할 때 독일어를 배웠다. 졸업 마지막 학기만을 남겨놓고 유학 절차를 밟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집이 망했다. 정확히는 초기 자금을 대줘야 하는 아빠가 파산 직전까지 갔다. 2008년 제2금융위기라고 했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휴학을 해야 했다.


교수님 추천으로 콘텐츠진흥원에 들어가 6개월 계약직으로 일했다. 파티션 너머로 누구 하나 눈을 마주치지 않고 메신저로 업무 지시를 하거나 점심 메뉴를 정하는 사무실, 이른바 조직 생활의 첫 경험이었다. 그때 다시 '뭐가 되고 싶은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복학 후 시사교양 PD 준비를 제대로 해보자 싶었다. 당시 기자 공부를 하고 있던 구 남친(현 남편)을 따라 언론고시반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해 금융위기 여파로 방송사 공채는 없었다. 보통 한두해는 준비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하니 숨을 고르며 느긋하게 공부를 할 수도 있었는데,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케이블은 예능 일색이었고, 종편 채널도 없던 때다. 두드릴 수 있는 문 자체가 좁았다.


외주 프로덕션에 조연출로 취직했다. 인터뷰이나 출연자, 스폰서를 섭외하고 촬영 현장을 통제하는 것, 그리고 최종 완성본을 방송사에 납품하는 일을 했다. 카메라를 직접 잡거나 편집에 손을 대진 않았지만 하나의 스토리 안에 그림자처럼 내 흔적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다만 현실은 열악했다. 비단 돈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눈밖에 난 외주 PD를 골려 먹기 위해 강연 프로그램에서 일부러 졸고 있는 사람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지상파 스튜디오 카메라맨, 약속시간에 늦고도 소속을 묻고는 일절 사과 없이 오히려 호통을 치는 인터뷰이... 그곳엔 경멸과 환멸이 교차했다. 최근 독립PD의 죽음으로 불거진 열악한 제작 환경에 대한 기사를 읽곤 8년 전과 아무 것도 바뀐 것이 없음에 씁쓸했다. 만일 방송사에 들어갔다고 해도 고(故) 이한빛 PD가 목도하고 좌절한 현실에서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두 독립 PD의 죽음이 환기한 열악한 외주제작 환경

[어느 PD의 고백] 고 이한빛 PD가 남긴 것

한빛이는 누군가를 밟는건 의미없어 죽었죠


우리는 친구들에 비해 빨리 취업을 했다. 남편이 먼저 직장을 잡았고, 이듬해 나도 입사를 했다. 둘 다 IT전문지 기자였다. 메이저 언론사는 아니었지만, 취재 환경은 만족스러웠다. 아이폰 출시 이후 업계는 호황이었고 취재거리는 넘쳤다. 모두가 IT뉴스를 읽었다. 그만큼 경쟁이 거세기도 했다. 일단위 체계에서 분단위 속도로 살지 않으면 금세 뒤처졌다. 기자 일은 대개 즐거웠지만 내가 쓴 기사가 의도와 다르게 누군가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그게 기업이 됐든 아니면 개인이 됐든 여러 이해관계상에서 누군가에게 유리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는 때로 괴로웠다. 그때 회사 선배가 기자는 상처주는 직업이지 상처받는 직업은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이 또 상처가 됐다.


지금 남편은 종합지로 옮겨 기자 생활을 계속 하고 있고, 나는 기업홍보 일을 하고 있다. 전직을 한 셈인데 업 자체가 크게 동떨어지는 일은 아니다. 기자가 취재를 하는 다양한 분야에 기업이 있고, 나는 기업서 기자를 상대하는 일종의 대변인 역할을 한다. 처음 홍보 경력직 입사 제의를 받았을때 한 기업 안에 들어가서 생생한 이야기를 직접 듣고 가공해 전달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다. 실제 그랬다. 다만 바이라인(byline)이 없다는 상실감이 꽤 오래 지속됐다. 회사에서 쓰는 모든 글은 내 글이 아니라는 걸 좀 지나서야 알았다. 이번엔 조직 내 역학관계의 피로함이 생겼다.


흔히 받는 질문이 "기자를 했다가 홍보를 하면 어때요? 어떤게 더 잘 맞아요?"인데 몇해째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질문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기자다) 기자 일을 그만둔 이유가 홍보를 직업 삼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홍보를 시작한 이유 역시 기자를 하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그냥 때마다의 고민과 주어진 상황대로 열심히 했을 뿐이다. 겪어보니 각각의 직업은 상대적인 애로점이 분명했다. 하지만 얻은 것 또한 명확했다. 기자일 때 일하는 방식을 배웠다. 기업의 홍보 담당자로는 일하는 태도를 익혔다. 해야 할 이야기를 글로 쓰고 말로 하는 본질은 같다. 그게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이다. 지나고 보니 깨달은 것들이다.


뭐가 하고 싶어요?
직업은 직(職)과 업(業)이라는 두 글자로 나뉘는데, 직(職)은 사장, 부장, 팀장 같은 직함과 명함을 의미한다. 조직 내에서는 파워를 갖지만 그 자리를 떠나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진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증발되어 버린다. 사무실, 열쇠, 법인카드, 인감, 연봉, ID카드, 전용 차량 같은 것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반면에 업(業)은 일을 통해 축적된 본연의 힘을 말한다. 경험과 기술, 노하우, 네트워크, 아이디어, 장인정신 같은 무형자산을 말한다. 신기루에 현혹되지 않고 안전하게 사막을 건널 수 있는 능력이다.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했던 <인턴>은 은퇴자의 지혜와 경륜을 정면에서 다룬 영화다. 회사를 나와 조직의 후광 없어도 일할 수 있는 전문성, 그것이 업의 힘이다. <손관승|투아레그 직장인 학교 8p>


이제 기자를 했던 것보다 홍보를 한 경력이 조금 더 길어졌다. 솔직히 처음에는 '상대는 갑이고 나는 을이다' 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시쳇말로 '물이 덜 빠졌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더 몸을 낮추려고 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물론 특정한 이해를 위해 뭔가를 꼭 유리하게 알리거나 또 불리한 경우 읍소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순간, 나는 완벽한 을이다. 하지만 상대와의 관계에서 정보를 쥐고 있는 사람은 나다. 직함의 동등한 등가교환이 어렵다고 해도, 일의 경험치가 쌓이니 이런 자신감이 붙었다. 무작정 열심히만이 아닌 조금 즐길 줄 알게 됐다.

기업홍보를 시작한 후 어쩌다 벌써 세번째 직장이다. 케이블TV(대기업 계열), 부동산(스타트업), 이커머스(중견기업).. 거쳐온 곳들이 크게 보면 IT라는 기반은 같은데, 업종은 다 다르다. 그래서 매번 새롭고, 어렵지만 재밌다. 계속 이직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운이 좋게도 늘 일할 수 있는 기회가 먼저 주어졌다. 내내 고민하고 부딪쳤던 경험이 지금의 시간을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예상치 못하게 짧은 기간 여러 군데를 거치게 된 조직생활에서의 이런저런 생채기들도 굳은 살이 돼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 직(職)에 대한 선망보다는 업(業) 자체에 대한 확신이 중요하다. 평범한 직장인이 됐고, 더이상 특별한 무엇이 되기를 꿈꾸지 않는 나이가 됐다. 그래도 하고 싶은 건 여전히 많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즐겁게 일을 하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질문한다. 나는 대체 뭐가 하고 싶은지. 이게 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그래도출근생각하면지옥
#일의즐거움과고단함은별개
#향후예상'시발비용'에서현재의'시발비용'을뺀값이플러스면결정하는것이이직임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말(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