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토록 Sep 16. 2022

저기요, 그건 제 아이디어입니다만

미국 대사관 직원들을 위한 초청의 밤이 열린다고 했다. 본격적인 해외 진출에 앞서 그들에게 작품을 선보이고 반응을 살피는 자리였다. 언론에 대대적인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그들이 만족스럽게 공연을 봐줘 좋은 평들이 나온다면 해외 진출을 위한 하나의 청신호가 될 것이다.


대사관 직원들이 오는 날에는 좀 더 합이 잘 맞는 배우 캐스팅이 있어야 할 거고, 또 참석한 분들께도 기억에 남을 만한 인상적인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전 직원이 모여 회의하자고 했다. 누구라도 좋으니 미리미리 고민해서 좋은 아이디어가 있으면 자유롭게 발표하라고.


오래간만에 신이 났다. 공연 아카데미에 다닐 때 피칭을 준비하며 MD상품 제작과 관련해서도 자료 조사를 많이 했던 터. 그때의 즐거운 기억이 새록새록 올라오며 실제 나의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 생각했다.


당시 우리가 판매하고 있는 건 프로그램 북과 배우들 엽서뿐이라 조금 아쉬웠다. 이번을 계기로 새로운 MD 상품이 제작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고민은 제작팀이 나설 영역은 아니었다. 홍보마케팅 팀에서 알아서 할 일이었다. 하지만 전 직원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다니 왠지 나도 슬쩍 내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많이 고민했다. 이왕이면 우리 공연과 무관하지 않고, 공연을 떠올릴 수 있는 상징적인 아이템이라면 좋을 것 같았다. 배우들이 거의 자신의 신체 움직임을 이용하고 있어 딱히 사용하는 소도구들이 많지는 않아 쉽진 않았다.


‘아, 맞다, 부채!’ 공연을 이끄는 중심 격의 할아버지가 공연 내내 계속 들고 있는 부채가 떠올랐다. 한국적이면서도 공연의 소품으로 쓰이고 있고 마침 날씨도 더워지고 있으니 부채를 활용한 브로셔를 만들면 외국인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다 싶었다.


아이디어 회의가 계속됐지만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썩 괜찮은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았다. 그제야 용기를 내서 말을 꺼냈다. 부채로 하면 어떻겠냐고. 하지만 별 반응 없이 묻혀 버렸다. 내 의견을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여직원 한 명 만이 호응해 주었을 뿐이다.


결국 대사관 직원 초청일에 제공한 선물은 태권도를 하는 사람 모양의 작은 피규어 같은 것으로 결정됐다. 인사동 어느 기념품 숍에서나 볼 법한 평범한 아이템. 하지만 윗분들은 결국 태권도에 꽂혔나 보다. 태권도를 중심 소재로 한 공연인 만큼 그 의미를 담고 싶었나 보다.


그래,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 기분이 상한 건 그다음이었다. 수개월 뒤 우리 작품은 결국 에든버러에 참가하게 됐다. 해마다 8월이면 도시 전체가 축제의 장이 되는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 그곳에서 열리는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은 기네스북에 등재된 세계 최대 공연 예술 축제다.


요즘은 에든버러에 참가한다고 딱히 기삿거리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당시엔 해외 페스티벌에 참여하는 작품들을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참가한다는 것만으로도 공연계의 큰 이슈였다. 많은 기자들이 관심을 보였다. 매우 중요한 기회였다. 그곳에서 세계인들이 호의적으로 반응해 준다면 작품의 해외 진출에 가속도가 붙을 것이다. 좋은 해외 반응은 국내 홍보에도 탄력이 붙게 하니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해야 했다.


수많은 기자들의 경비까지 감당하며 에든버러 투어팀이 꾸려졌다. 현지에 가면 밤에 공연하기 전까지 배우·스태프가 거리를 돌며 직접 공연 홍보에 나서야 하는 시스템이었다. 수많은 공연팀이 참여하기에 수백 명의 관광객들을 상대로 공연을 알려야 해서 브로슈어로 ‘부채’를 제작하기로 했다는 거다. 기뻤다. 대사관 직원들 초청 때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나의 의견은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잠시 접어둔 것일 뿐이었구나. 뿌듯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나보다 늦게 마케팅팀에 합류한 M대리가 제안한 것으로 둔갑했다. 가뜩이나 탐탁지 않아 보이던 그가 나의 아이디어를 가로챘다는 사실이 참아지지가 않았다.


나의 작은 분노를 알아챈 동료 여직원도 동조해 주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댄다는데 저 인간이 아주 나랑 한번 해보겠다는 건가’ 싶어 결국 말을 꺼냈다.


“저, 그 부채요, 그거 지난번에 제가 냈던 의견이잖아요…”

“이거요? 언제요?”

“아니, 제가 이전 회의 때 공연 소개하는 브로슈어를 부채로 만들자고 말씀드렸잖아요~ OO 씨도 옆에서 같이 들었거든요?”

“웅? 난 모르겠는데… 그때랑 달라요”


그까짓 부채 하나. 홍보 도구로 쓰이는 아이템 하나가 뭐라고 그 난리였나 싶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중요했다.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나름 오랜 시간 고민했고, 회사를 위해, 작품을 위해 도움 될 만한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 준비한 내 아이디어였다.


실제로 에든버러에서 부채 아이템은 매우 효과적인 쓰임새를 다했다. 그에 대한 칭찬도 많았다. 나의 서러움은 더욱 커졌다. 하나가 미우면 다 밉게 보인다지. 평소 까칠하고 시건방진 태도와 말 모양새에 직급이 나보다 높아 뭐라 한마디 할 순 없었지만, 하필 그런 존재가 보여준 모습이기에 너무 화가 났다.


그러다 결국 에든버러 축제 기간 동안 사무실에 전화해서 (내 기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그에게 소리 지르며 대들었다. 미쳤었나 보다. 그래도 직급이 나보다 위였는데. 사무실에 있던 모두가 놀랐다. 옳지 않은 행동이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면 업무 방식에 차이가 생길 수 있다. 누구 하나가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다. 충분히 의견 차를 좁힐 수 있다. 하지만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내 마음의 의지가 없었다. 아예 처음부터. 나뿐만이 아닌 다른 직원들도 그에 대해 다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부정적으로 말하니 ‘내가 옳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엄연히 위계질서가 존재하는 곳에서 아래 사람인 내가 선을 넘은 것이다.


그때의 나는 시야가 좁았다. 우리가 시장에 내놓는 작품은 ‘사람들의 혼이 깃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다량으로 찍어내는 공산품 마냥 취급해선 안 된다고. 매출에 급급해 배우·스태프를 소모품 취급하는 듯한 평소 그의 태도에 제작팀에 있던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내 입으로 가장 거칠게 욕하던 1인 중 하나가 됐다. 나 하나와 부딪혔다면 그건 ‘서로의 다름’이라 생각할 수 있었을 테지만, 내가 아는 한 당시에 그를 좋아하는 직원, 배우, 스태프를 본 적이 없다. 여직원들이 모이는 자리에 안줏거리로 늘 그의 이름이 올랐다. 우리는 그를 “걱정하는 것”일 뿐이라고 합리화하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내가 그를 좋아하지 않았던 만큼 그도 배우·스태프의 입장만을 너무 대변하는 듯한 나의 업무 방식에 대해 험담을 열심히 하고 다녔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그에게 미안하진 않았다. 뒤에서 욕하고 다니는 것이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나는 에든버러 프린지의 좋은 성과로 해외 진출이 탄력을 받고 대학로의 낡고 허름한 사무실에서 벗어나 종로 중심으로 사무실을 옮기는 준비가 되어 갈 때쯤 퇴사를 결심했다. 직원들은 물론 배우 스태프들이 오랜 시간 회사에 적금처럼 쌓아 둔 밀린 월급들을 목돈으로 한꺼번에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니 훌훌 털고 떠나고 싶었다.


회사 형편이 너무 어려울 때는 나 아니어도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거기에 나까지 빠져나갈 순 없었다. 다들 힘들게 일하는데 나까지 떠나면 남은 사람들이 더 힘들어질 것을 알기에. 하지만 이제는 성공 가도를 달릴 일만 남았으니 어떤 마음의 부담 없이 훌훌 털고 떠나도 괜찮을 듯했다.


노동의 대가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작고 소중한 월급. 그마저도 매달 꼬박꼬박 받을 수도 없던 시절을 버텨냈지만 회사에 마음 붙일 사람이 없었다. 내 아이디어를 가로챈 그의 입지는 더욱 커져갔고, 그나마 나에게 호의적이었던 사람들은 또 다른 공연팀을 구성해 분리가 되는 시점이었다. 더 이상 팀에 남아있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최소한 어려운 시절 혼자 도망치는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을 리 없는 상황이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하질 않나. 회사는 나보다는 그에게 힘을 실어주길 원하고, 그는 나를 싫어하니 나를 키워줄 리 없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려는 나의 노력은 결국 하찮게 여겨질 게 뻔했다. 아무리 자식 같은 마음으로 애정을 쏟아 온 팀이라고 해도 남아 있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좋다. 이제 나는 떠날 테니 그가 원하는 대로 다 맞춰 주리라. 그가 원하는 방향에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군말 없이 모든 걸 다 했다. ‘어차피 앞으로 남아 이 팀을 지킬 사람이 당신이라면 당신 뜻대로 다 하시오’ 그게 순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다. 마음을 비우니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부딪힐 일이 없어지니 하루하루가 편했다. 얼굴을 붉힐 일도, 험한 말을 할 일도, 퇴근길에 뒷담화를 할 일도 전혀 없었다. 다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그저 내가 몸과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던 작품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돈을 못 벌어도, 카드값이 밀려도, 그들과 함께 일하는 시간이 행복했다. 현실적인 문제들 앞에서 사직서를 쓸까 말까 수만 번 갈등하면서도 무대 위에서 온 힘을 다해 몸을 사리지 않고 열연하는 배우들을 보며 다시 힘을 내던 시절이었다. 몸이 부서져라 연기하고 땀 흘리는 그들 덕분에 가슴이 벅찼다. 내 일에 자부심을 느꼈다. 객석을 빠져나가는 관객들의 행복한 미소에서 내일을 살아갈 에너지를 충전하곤 했다.


그런 나의 일터를 뒤로해야 하는 현실이 속상했다. ‘나는 이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까…’


나는 인정받고 싶었다. 더 이상은 나를, 나의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 팀에서는 나의 열정과 에너지를 소진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에 가도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줄 수 없다. 나와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다면, 부딪히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만큼은 아니겠지. ‘저 인간’처럼 나를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인간은 다시는 없겠지. 한 달 노티스와 함께 퇴사 의사를 밝혔다.


그때의 내 결심은 정말 확고했다. 누구도 내 마음을 바꿀 수 없었다. 4년 차. 만 3년을 꽉 채우지 못했지만 일단은 좀 쉬고 제작팀 경력직으로 어디라도 도전해 보자는 마음이었다. 더 이상은 서러운 내 속마음을 모르는 척하며 버티고 싶지 않았다. 존중받으며 일하고 싶었다.  

이전 09화 어느날 사수가 사라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