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회사의 타악 퍼포먼스에 이어 또 하나의 대표 넌버벌 퍼포먼스. 태권도를 소재로 한 우리 공연도 에든버러 페스티벌을 통해 전 세계인에게 알릴 기회를 얻었다. 처음부터 내가 이 팀에 들어온 건 세계화를 목표로 탄생된 작품이라는 이유였다. 캐나다에서 배운 영어 실력을 이제야 발휘할 수 있겠구나. 제작팀이니까 배우 스태프를 인솔해 나도 해외에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이 스멀스멀 내 안에 차올랐다.
하지만 나는 배제되었다. 페스티벌 기간 동안에도 서울 전용관 공연은 이어가야 했기에 그곳 운영을 맡을 사람이 필요했다. 그 책임자가 내가 되었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제작팀 매니저라고는 나 하나인데 어찌 한 달이란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울 수 있으랴. 그러니 투어팀에 들어가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남아 묵묵히 내 일을 했다. 해외에서 추가적으로 필요한 소모품을 보내는 소포도 준비 했다. ‘비타민C 레모나’ 한 상자를 별도 포장해 배우·스태프를 향한 응원의 메시지를 하나하나 써 붙였다. 그것이 누구에게 전달이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타지에서 밤낮으로 고생할 배우·스태프들한테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해가 바뀌었다. 또 에든버러에 간다고 했다. 이번에는 지난해에 가지 못한 배우들을 좀 섞어 팀 구성이 된다고 했다. 아, 그렇다면 내게도 기회가 있지 않을까. 나도 전 세계에서 활약하는 공연예술인이 모여든 도시의 분위를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그 에너지를 단 며칠만이라도. 누군가의 입을 통해서가 아닌, 미디어를 통해서가 아닌,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직접 체험하길 원했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돈 들여서 영어도 배워뒀는데… 나에게도 부디 기회가 있기를.
당연히 씨알도 안 먹힐 헛된 기대감이었다. 이번 투어 공연의 책임자도 역시 나를 좋아하지 않는 그였다. 나는 또 한 번 철저하게 배제됐다. 이번 투어 공연의 총괄자도 그였기 때문일까. 나를 더 속상하게 했던 건 그런 분위기에서 누구도 나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지 않냐고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감독님과 연출부를 제외하고 제작팀의 모든 업무를 맡고 있는 담당자는 나였는데 그들의 안중에 나란 사람은 없었다.
한 달 내내 서울을 비우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단 일주일 만이라도 그곳의 분위기를 직접 체험하고 그곳에서 나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기회를 주지 않는 회사에 서운했다. 내색하진 않았다. 내 입으로 얘기하면 너무 초라해질 것 같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예 처음부터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인 듯했다.
에든버러 투어 팀의 부재 속에 또다시 나는 지방 투어를 인솔했다. 여전히 현장 진행비는 나오지 않았다. 또 내 카드를 긁고 지방 투어 공연을 떠났다. 진행비 없이 가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였다. 내가 먼저 쓰고, 청구하는 식. 카드 없으면 어쩔 뻔. 덕분에 한도는 잘 올라갔다. 더욱 안정적으로 지방 투어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잘 됐네.
그 사이 여러 일을 거쳐 앞서 얘기했던 퇴사 후에 나는 회사로 다시 컴백했다. 의도했던 바는 아니지만 다른 법인 명으로 준비하던 춤을 소재로 한 공연팀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건 3주간 떠나 있던 영국 런던에서 본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때문이다. <빌리 엘리어트>를 통해 춤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나는 여행에서 돌아와 나를 불러주신 W 감독님의 제안을 굳이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춤이 메인이 되는 작품에 대한 갈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법인으로 옮겨갔던 분들은 내가 다 좋아했기에, 익숙한 환경이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조금은 분리된 환경 속에 한 번 더 나를 던져보자 싶었다.
영국에서 프리미어로 선보인 해당 작품도 그해 여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초청받았다. 내가 참여하는 작품이 연속 3년째 해외 페스티벌에 나가게 된 것이다. “OO 도 올해는 에든버러에 한번 가봐야지~.” 누군가의 얘기에 기분이 좋았다.
‘야호, 드디어 나도 간다. 미리미리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해 둬야지. 영어 못해도 다들 잘만 갔다 오지만 이왕 가는 거 더 많은 외국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작품을 알려야지.’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른 해외 작품도 보고 싶었다. 결국 내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감… 은 헛된 꿈이었다.
그 해에도 나는 서울에 남았다. 아직 여러 팀이 세팅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해외로 나가는 투어팀을 제외하면 국내 공연 진행은 불가했다. 그러니 내가 서울 공연 또는 지방 투어를 맡아야 할 구실은 없었다. 대신 연습 배우 케어가 남아 있었다. 하반기부터 예정되어 있는 전용관 공연을 소화하기 위해 여름 기간 동안 배우 트레이닝이 필요했다. 조연출을 서포트할 제작팀이 서울에 남아 있어야 했다… 고 한다. 하, 그렇구나. 이번 투어 진행의 핵심 멤버로 또 ‘그’가 자리했다. 이전 2년간의 투어를 인솔한 경험에 이번 투어에도 ‘그’가 붙은 것이다. 그러니 투어팀에 내 자리는 당연히 없었다.
왜 매번 나는 이렇게 철저하게 배제당해야 할까. 매 순간 열심히 일했고, 큰 실수도 하지 않았는데.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과도 원활하게 소통하며 일하고 있는데 중요한 이슈가 있을 때 나의 존재는 늘 이렇게 먼지처럼 사라지는구나. 또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래, 누군가는 서울에 남아야 한다. 그게 내가 되었을 뿐이다. ‘왜 꼭 나여야만 하지?’라는 생각은 말자. ‘내가 일을 잘해서 그렇지 뭐. 혼자서도 서울팀을 책임질 능력이 되니까 이것도 믿고 맡기는 거야’ 자기 위안과 함께 나는 그렇게 또 서울에 남았다. 매번 이렇게, 그것도 3번씩이나.
내가 비록 회사의 창립 멤버는 아니어도 그 어디쯤 비슷한 시기의 멤버인데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소외당하는 현실에 씁쓸함을 넘어 이제는 초연해져야 할 때라 생각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깊은 생각은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