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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향한 갈망과 현실

by 이피디

에든버러. 세계 각국에서 모인 공연예술인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선보이며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예술의 중심지이자, 내게는 늘 동경의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내 공연이 무대에 오르는 상상을 했다. 세계를 향해 뻗어나가는 작품을 함께 만들고 싶었다. 캐나다에서 배운 영어를 드디어 쓸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도 부풀었다. 나는 단지 ‘기회’만 주어진다면, 내 역량을 증명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나는 그 팀에 합류했다. 뜨거운 마음으로, 묵묵히 나의 자리를 지켰다. 하지만 페스티벌 시즌, 팀은 서울 공연도 병행했고, 나는 그 운영 책임자로 남게 되었다. 제작팀 내 유일한 매니저가 자리를 비우기 어렵다는 사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심 아쉬웠지만, 나는 서울에서의 역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투어 팀을 위한 소모품을 챙기고, 비타민 하나하나 정성껏 배우와 스태프에게 응원 메시지를 썼다. 그들이 그것을 받았는지, 어떤 반응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마음이 전해지길 바랐다.


그렇게 첫 기회를 놓쳤지만, 다시는 뒤처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다음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또 한 번의 에든버러 참가가 결정되었다. 이번에는 지난해에 함께하지 못했던 배우들도 합류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에 나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영어도 꾸준히 공부했고, 언젠가 직접 그 현장을 밟고 싶다는 꿈은 여전히 간절했다. 그러나 결과는 같았다. 아무도 내게 “이번엔 같이 가자”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조용히 가려졌다.


그때부터 나는 질문을 품기 시작했다. 나는 왜 항상 배제되는가. 현장에서 사람들과 잘 지냈고, 눈에 띄는 실수도 없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채우려 노력했다. 그런데 중요한 순간마다 나는 점점 투명한 존재가 되어갔다. 말은 없었고, 설명도 없었다. 오로지 결과만이 존재했다. ‘너는 남는다.’


서울에 남아 지방 투어를 이끌었고, 현장 진행비 지원 없이 개인 돈으로 진행 비용을 감당했다. 모두가 “고생했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나 아니면 안 되는 자리’를 지키는 동시에, ‘언제든 대체할 수 있는 존재’로 취급받고 있다는 이중적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한편으로는 '그래도 내가 있어야 팀이 굴러간다'는 자부심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왜 나는 늘 이 자리에만 머무는가?’ 하는 씁쓸함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기존 회사에서 새롭게 준비하는 ‘비보잉’을 소재로 한 작품 팀으로 돌아왔다. 런던 여행에서 춤의 매력을 알게 해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영향이었다. 그 작품 역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초청을 받았다. 이번에는 다를 거로 생각했다. 다시 한번 들뜬 마음으로 준비했고, 이번엔 정말 직접 그 현장을 밟게 될 거라는 믿음도 생겼다.


그러나 또다시, 나는 서울에 남게 되었다. 여름 이후 전용관 공연을 위한 세팅이 필요하고, 연습생을 챙겨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애초에 나를 위한 기회가 아니었다는걸, 나는 그제야 인정했다. 그리고 비로소 받아들였다. 이 여정의 끝에 내가 바란 ‘무대’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 경험들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외면당한 감정을 삼키며 묵묵히 내 자리를 지켰고,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않은 상실감 속에서 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웠다. 때로는 모든 것이 허사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떳떳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문득, ‘내가 얻지 못한 기회’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성장의 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내가 그 자리를 지켜주는 것도 누군가를 위한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돌아보면, 내가 원하는 결과만을 좇았다면 이 모든 시간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늘 뒤에서 팀을 받치고 있었고, 때로는 내 자리가 무겁고 외로웠다. 그러나 그 자리를 지키는 나를 통해 공연이 안전하게 완성되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경험을 하고 성장했다. 내가 직접 에든버러를 밟지 못했더라도, 그곳에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떠나보내며 마음을 다해 응원했던 시간은 분명 나의 일부가 되었다.


지금도 나는 ‘기회’를 갈망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단지 더 넓은 무대로의 진출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다잡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진짜로 얻고 싶었던 성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나는, ‘기회’가 단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내가 원하는 곳에 서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끝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자리가 바로 그곳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자리를,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비록 ‘가려진 자리’라고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나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더 큰 기회를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지켜온 그 자리가 누군가에게는 더 큰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그 모든 것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 나는 나의 자리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주어진 역할을 다하며, 내가 하는 일이 단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누군가의 기회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비록 내가 처음 원했던 기회는 아니었지만, 결국 그 자리가 나에게 준 것은 더 많은 성장과 배움이었다. 그리고 그 배움 속에서 나는 더 단단해졌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다시 나의 자리를 묵묵히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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