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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Dec 14. 2019

'잘한다'의 덫에 걸려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네

휴직일기(6) 내가 웬만해선 뭔가를 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어제 일기를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보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내가 했던 일이 다 잘 되었던 이유를




중학교 1학년 때였나.. 학교에서 성격검사를 한 적이 있다

당시 검사 결과에 적혀있던 내 특징 중 하나는

<안정적인 것을 선호해서 도전을 잘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지금과는 다르게) 아주 활발한 성격이었고,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고 남다른 아이템을 갖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기 때문에

그 검사 결과는 아주 터무니없게 느껴졌다

이렇게 차별화를 좋아하는 내가 안정을 좋아해서 도전을 안 한다니

뭐 이런 신빙성 없는 검사가 있냐며 흘려 넘겼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중2병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점점 자라면서 깨닫게 되었다

그 검사 결과는 아주 정확한 것이었음을



나는 두려움과 불안이 항상 많은 사람이었고

실패해도 괜찮은 가정환경에서 자라지도 못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라도 안정을 추구해야 했다


안정적인 길은 언제나 사회가 지지하는 '정답'이라 불리는 방향이었고 나는 생존을 위해 그 길을 성실히 걸었을 뿐이다

그 길에서 벗어날 생각조차도 하지 못한 채로, 그 길 밖에도 또 다른 길이 있음을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한 이유는
학생이 해야 할 일은 공부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학생의 본분이 공부가 아니라 춤이었다면,
나는 춤을 죽어라 연습해 춤 잘 추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나는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인생을 살아온 사람

그래서 항상 좋은 결과를 내온 사람이지만

사실은 생존을 위해 주어진 일을 미친 듯이 해왔을 뿐인 사람인 것이다





또, 나는 당연하게도

못할 것 같은 일엔 도전하지 않고 살아왔다

하고 싶어도 실패할 것 같은 일은 엄두도 내지 않고 외면해왔다


중3 때 나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작곡가를 하고 싶었다

대학교 1학년 때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지금은 작사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길을 위해 본격적으로 뛰어들어본 적이 없다


작곡은 아무나 하냐,

시인은 타고나는 거야,

작사가 쉬워 보이지만 어려울 걸,

이런 말을 들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 꿈을 포기해버렸다





이렇게

잘하면 좋은 일만

잘할 수밖에 없는 일만

주구장창 파왔으니 잘한다는 말 듣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니었을까

누구라도 나처럼 살았다면.. 뭐든 웬만하면 잘하는 사람으로 자라지 않았을까


다른 친구들이 뭔가를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뭔가를 배우는 동안

'이런 하나 못해도 인생은 망하지 않는다'는 걸 부딪히며 체득해가는 동안

나는 안전한 길을 걸으며 '잘한다'는 말에 익숙해지기만 하며 살았으니


그 필연적인 칭찬에 익숙해져서

나는 엇나가지 않는 길을 걸어야만 괜찮게 살 수 있다고

나는 뭔가를 잘해야만 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래서

사수 선배의 "정답 찾으려고 하지 마", "네가 하고 싶은 생각해"라는 말이 난 그렇게 좋았고


그 선배가 사라져서 다시 '잘한다'는 말을 들어야만 괜찮은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었을 때 그리도 무서웠나 보다





그걸 나는 이렇게 늦게야 알았는데..

이제부터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일단은 처음 해보는 일들을 차근차근 배워나가 봐야겠다고 생각해서.. 이것저것 배우고 있다


20대 후반이나 되었는데, 요즘의 나는 다시 초등학교에 입학한 애 같다


10살이 되던 해에 엄마가 나에게 편지를 써줬다
10대가 된 걸 축하해, 로 시작되는 편지
나도 이제 완전한 1인분의 사람이 되었음을 응원하고 축복해주는 내용이었던 걸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 편지에는 무슨 말이 적혀있었을까,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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