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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Dec 22. 2019

나는 '자신'이 없는 사람입니다(2)

휴직일기(14) 두 번째 상담치료를 통해 생각한 것들(2)



지난 글에 이어 나에게 없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마저 적어본다

*지난 글: https://brunch.co.kr/@itscloudy/54



(내게 없는 나머지 자신 하나.) 남보다 더 존중받는 나 자신



병원을 전전하다 큰 병원에 진단서를 받기 위해 갔던 날, 일정이 급하다는 나의 말을 들은 의사 선생님의 배려로 급하게 특수뇌파검사를 받게 되었다

대기가 많이 밀렸는데 다행히 취소된 자리 생겨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검사를 담당하는 한 선생님이 원래 이 검사를 하려면 몇 달은 기다려야 하는 것인데 환자분이 정말 운이 좋으시다고, 의사 선생님이 정말 신경 써주신 거라고 여러 번 말씀해주셨다



특수뇌파 검사라는 것은 평상시 혹은 어떤 작업을 할 때 머리 곳곳에서 발생하는 뇌파를 아주 정밀하게 측정하는 검사라고 했다

그래서 머리 곳곳에 뇌파를 인식할 수 있는 센서를 붙인 채로 시행되어야 했는데, 그 장치가 머리에 잘 고정되진 않으니 풀칠을 해야 한다고 했다

풀칠이라는 게 그냥 종이 붙이기처럼 손쉬운 것은 아니었는지 두 분이 달라붙어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내 머리에 풀을 짜내고 그 풀이 구석구석 스며들어 접착될 수 있도록 뾰족한 무언가로 내 머리를 꾹꾹 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프면 말씀해주세요"라는 말을 처음에 듣곤 '뭐 얼마나 아프겠어'라고 가볍게 넘겼는데 그 작업이 생각보다 많이 아팠다

예전에 한의원에서 예고도 없이 머리를 침이 가득 박힌 몽둥이로 잔뜩 맞은 적이 있는데, 그때 뾰족한 걸로 사정없이 찔리던 그 공포스러운 기억이 떠오를 정도였다



그렇지만 나는 아프다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검사를 받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검사 시간이 지연되면 정상적으로 예약한 다른 환자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풀칠 작업은 20분도 안 걸려서 끝이 났다, 나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그러나 이후의 대화를 통해 나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엄청 잘 참으시네요, 안 아프셨어요?"

"아뇨.. 아팠어요...."

"보통은 50분 넘게 걸리는 건데.. 역대 최고로 빨리 끝냈어요!
너무 다른 사람만 배려하시는 스타일이신가 보다.."



검사도 받기 전이었는데 검사 결과의 일부를 훔쳐본 듯한 느낌이었다










언제나 내 의견을 말하는 것이 두려웠다

'상대방이 내 의견에 반대하면 어쩌지', 혹은 '반대하는데 표현은 못하고 속으로 날 미워하면 어쩌지'라는 걱정이 항상 내 맘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 의견을 말할 수 없으면 그냥 기분 좋게 상대방에게 맞춰주면 될 것을, 속 좁은 나는 그렇게 멋지게 걱정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못 되었다



상대방의 반응을 보기 전에 먼저 배려해 버리거나
(= 맨 나중에 의견을 말해서 자연스럽게 다수인 쪽에 동조하기)

상대방의 반응에 맞추어 내 의견을 굽혀버린 뒤
(= 난 아무거나 괜찮아, 다음에 하지 뭐.. 같은 말로 무마하기)

다음번에는 내가 그랬듯이 상대방이 나를 배려해주길 바랐다

배려라는 건 배려했다는 자체로 끝인 것인데, 마치 빌려준 돈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처럼 언제 배려가 돌아오는지 지켜보았던 것이다



의사소통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서로 다른 의견 사이에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해내는 것이다

여기엔 크고 작은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각자의 의견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결론이 가져오는 불편함을 해결하는 방법을 논의해가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하지만 나는 이 과정을 생략해버리고 내 의견을 말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것도 마치 상대방이 원하지 않은 부전승을 시켜줘 놓곤 그걸 고마워하길 바라면서



항상 이렇게 착하지 않으면서 착한 척을 하는 소통만을 해온 탓에 나는 항상 찝찝했다

불편했고, 괜히 서운하기도 했고, 때로는 자기 의견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사람이 이기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게 항상 나 자신을 숨기기만 했으니 누구와 대화를 해도 속이 시원한 적은 잘 없었다

가끔 집에서 망나니처럼 헛소리를 해댈 때에만(집에선 이렇게 해도 날 미워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있으니까) 속이 시원했을 뿐이다



오늘도 나의 이런 태도에 대해 오빠와 이야기를 했다

참고로, 오빠는 내가 원하는 것이 있어도 말하지 않으면서 그걸 알아서 챙겨주길 바라는 노답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절대로 그렇게 해주지 않는 사람이다

오빠는 자기의 의견을 말하지 않고 상대가 알아주길 바라고, 자기가 표현하지 않았으면서 서운해하는 것은 상대방을 의도치 않게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과는 의견을 조정할 수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은 일방적으로 상대방에게 미안함이나 짜증을 느끼게 한다고 했다



전부 맞는 말이다, 나 같아도 나 같은 사람과 있으면 괜히 눈치가 보이고 답답할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행동하고 싶지 않은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내 안에서라도 '남보다 더 존중받는 나 자신'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이미 남보다 나를 더 존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누구보다 더 이기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자기 의견을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을 이기적이라고 생각해버리고, 내 배려를 알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남과 나를 동등한 선에 두고, 서로의 의견을 떳떳하게 드러내며 대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이 문제는 지난번에 썼던 글에서 언급했던 '내 생각을 드러내도 큰일 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해결해가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친구들이 "나는 오늘 떡볶이 안 먹고 싶어"라거나, 다른 환자들이 "너무 아파서 못 참겠어요"라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조율해가듯이

나도 그렇게 나를 조금씩 드러내가는 연습을 하면서, 내 의견이 다른 사람의 것과 충돌했을 때 조정하는 연습을 해야 하겠지






나의 얽힌 실타래에 대해 생각해볼 때마다 너무 머릿속이 복잡하다

처음엔 막연히 회사에서 너무 고생을 해서, 사람의 나쁜 면에 상처 받아서 문제가 생겼다고만 생각했는데

깊이 들여다볼수록 나라는 사람이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8년 동안 미움받지 않고, 무난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한 길만 택하면서 나라는 땅을 단단하게 다지지 못한 결과가

이제 와서야 우르르 몰려와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지금이라도 나를 제대로 쌓아 올릴 수 있을까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는데, 그에 앞서 나는 비를 맞을 자신은 있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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