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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Dec 21. 2019

나는 '자신'이 없는 사람입니다

휴직일기(12) 두 번째 상담치료를 통해 생각한 것들(1)



지난주에 이어 두 번째로 상담을 했다


오늘 선생님을 만나면 사연을 말하며 분노를 내뿜으려 벼르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됐는지, 그때 기분이 어땠는지, 누군가에 대한 생각은 어떠한지 등등 그 오래된 감정 덩어리를 쏟아내고 싶었다

저번 상담 후 어떻게 보냈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이야기를 하며 "너무 싫어요"를 적어도 5번은 말했다


하지만 그 사연에 대한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건 내 마음에 있는 문제의 방을 여는 열쇠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짜 핵심은 나에게 '자신'이라는 게 부족하다는 것, 어쩌면 아예 없다는 것이었다





(내게 없는 자신 하나.) 결과를 책임질 자신



책임지겠다는 생각으로 니 성격대로 해봐



채용전환형 인턴을 시작하기 바로 전날, 오빠가 해준 이 말은 인턴십을 하는 2달간 내 마법의 주문이었다

'아님 말고'라는 생각으로, 인턴이라고 눈치를 보며 정답이라는 틀에 맞추려 하기보단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다

떠오른 아이디어가 조금 생뚱맞아 보여도 일단 가져가 본 뒤 반응을 보고 OX를 판단해가는 그 과정이 은근히 재밌었다

내가 생각해도 좀 병맛인 아이디어를 선보여 무서워 보였던 모 팀장님과 인턴 동기들의 말잇못(...) 같은 반응을 보았던 날은 묘한 통쾌함까지 들었다



그러나 지니의 마법이 그러하듯, 나무꾼의 거짓말이 그러하듯 오빠의 주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떤 결과를 보게 되든 일단 해보고 감당하자는 생각이 아니라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내 진짜 모습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회사에서는 그 모습이 조금 덜 나왔다

아이디어를 낼 때 '아님 말고 아이디어'가 있어도 커버칠 수 있는 '괜찮은 아이디어' 여러 개를 섞어서 가져가면 됐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디어 낼 때 양으로 승부하는 건 잘 되었다..)



하지만 다른 일상, 특히나 인간관계에서는 도무지 결과를 책임질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회의의 룰과는 다르게 인간관계의 룰에선 여러 길을 한꺼번에 가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여러 갈림길에서 틀린 길로 진입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아예 갈림길에 멈춰버리는 것을 택했다

옳은 길 끝에 마중나와 있던 상대방이, 영 오지 않는 나를 데리러 갈림길로 직접 나와줄 때까지 말이다



세상엔 나 같은 수동적인 바보들만  있는 게 아닌 덕에 남들 하는 것처럼 친구도 사귀고, 연애도 하고, 취업도 하고, 여러 경험들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경험들은 순도 99.9%의 수동성 경험이었던 탓에 내게는 경험치란 것이 쌓이지 못했다

친구가 속상해할 땐 어떻게 달래줘야 하는지, 애인에게 실수했을 땐 어떻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지, 회사 선배에게 술 사달라고 할 때는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경험치가 쌓였어야 할 빈자리엔 대신 걱정과 불안이 눈치 없이 들어앉았다

내가 먼저 해본 적 없는 행동을 하게 되면 상대방이 싫어하지 않을까 겁내게 된 것이다

내가 밥 먹자고 해서 싫어하면 어떡하지, 놀자고 했다가 거절당하면 어떡하지, 이걸 선물했을 때 맘에 안 들면 어떡하지...

누군가는 이런 걸 걱정한다며 코웃음을 칠 사소한 일까지도, 쉬지 않고 돌아가는 걱정공장을 지닌 내겐 가로등 없는 시골길을 걷는 것만큼 무서운 일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신이 나를 불쌍히 여겨 0.1g의 용기는 남겨주신 모양이다

오늘 이런 내 모습을 상담선생님에게 털어놓게 되었으니-

"제 힘들었던 시간들을 남자친구에게 털어놓으면 저를 부담스러워할까 걱정돼요"라는 문장으로 나는 내 행동에 책임질 자신이 없는 사람임을 고백했다



선생님의 제안은, 일단 시도해보고 상대방의 반응을 보라는 것이었다

아주 명쾌하고도 당연한 답이었다 (누군가는 이런 얘기를 듣기 위해 비싼 돈을 주고 상담을 받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발생시킨 결과를 직접 책임지는 연습을 해보라고,

내가 상대에게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엄청난 일이, 나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직접 확인해보라고-

지금까지 OO씨의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남자친구는 걱정하는 것만큼 부정적인 반응을 하지 않을 거란 의견을 조심스럽게 비추면서 나를 북돋어주었다



인생은 어쩌면 굳이 뭔가를 저지르고 수습해가는, 누구라도 바보가 되어보는 여정일 뿐인데 나는 왜 그 안에 녹아들지 못했나

내가 누군가가 내민 손을 마지못해 잡을 줄만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그 진부한 말이 위인 세계의 것이 아니라 범인들의 세계에도 통용되는 것임을 충분히 알았더라면,

내 인생이 도전이나 개척은 못 되었어도 최소한 살얼음판은 되지 않았을 텐데-

결과를 책임질 자신이 없어 결과라는 것 자체를 포기해버린 내 삶이 참 공허하게 느껴졌다



나는 산속의 도인처럼 공허를 즐길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속세의 인간이기에

아주 많이 늦어버린 지금부터라도 사람들과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가야 한다

하여, 돌아오는 일주일 동안은 나 나름대로 여러 시도를 해볼 생각이다

안 하던 연락을 해보고,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살짝 해보며 나의 어떤 행동으로 인해 세상은 무너지지 않음을, 내 일상이 틀어지지 않음을 나 자신에게 조금씩 알려줘 갈 셈이다



이번에는 오빠의 주문도 없지만 내게는 조금 달라진 내가 있다

그러니 결과를 책임지겠다는 생각으로, 내 맘대로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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