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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Dec 13. 2019

나는 어쩌다 불안장애까지 얻게 된 걸까

휴직일기(5) 남탓도 많이 했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만든 굴레였던 것 같다


거의 2년간 힘들게 취업준비 끝에 입사한 이 회사


나는 왜 하루라도 더 다니기 힘들어진 걸까

내 마음이 왜 보람이 아니라 불안으로 꽉차게 되었을까


일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을 때 겨우 연락했던 선배와 이야기를 몇 차례 나누며 정리되기 시작한 이유들을 적어본다

(써놓고 보니 중구난방이다. 머리가 바보가 되더니 글도 엄청 못쓰게 됐네.)



1.

살아오면서 뭔가를 못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너는 어떤 애야? 너 부모님 속 썩여본 적은 있어?"

"너 하는 일마다 다 잘 됐었지?"

- 내 상태에 대해서 처음 선배에게 털어놓던 날, 선배가 나에게 했던 질문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모범생이었다

스스로 공부하고, 일탈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아서 선생님과 부모님에게 사랑받는 애였다

공부 외에도 그냥 이상하게 하는 것마다 잘했다, 특히 조금 다르게 생각해서 다른 결과물을 만드는 거

(어떻게 써도 재수없는 내용일 테니까 그냥 직설적으로 쓴다)

그래서 내가 만든 결과물은 항상 내 맘에 들었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도 들었다

그렇게 자라온 내게 내가 뭔가를 잘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회사에 입사할 때도 좋은 평가를 받고 들어왔고, 일을 하면서도 칭찬을 많이 받았다

다행히도(어쩌면 동시에 불행하게도) 이 회사에서 하는 일과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꽤나 잘 맞아서 더 결과가 괜찮았다

이런 식으로 회사를 다니다보니 '내 결과물에 칭찬을 받지 않음 = 실패'라는 인식이 생겨버린 것 같다

나는 아직 배우는 단계이고, 못하는 게 당연한 회사의 막내 of 막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매 회의마다 좋은 결과물을 내려고 더욱 더 노력하게 됐고 동시에 불안함도 커져간 것 같다

적당히 생각하고 쉬어야 하는데, 그 조절을 못해서 퇴근해서 잠자리에 들기까지 생각을 멈추지 못하기도 했다

못하기가 싫어서, 못하면 큰일날 거 같아서





2.

선배의 부재로 인해 업무 부담이 너무나도 커졌다



아무리 좋은 결과물에 대한 부담이 있었어도, 이전에는 나에게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나의 사수였다


내가 신입사원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정답(좋은 결과물) 찾는 건 선배들이 할 테니까 너는 네가 하고 싶은 생각해, 지금은 갇혀서 생각하지 않고 여러 가지 생각하는 연습을 하는 게 중요할 때야'라고 말해준 선배였다


그냥 말로만이 아니었다

선배는 아주 업무적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실제로 내가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고 아무렇게나 생각할 수 있었고, 혹여나 내 아이디어가 정말 쓰레기 같았을 때에도 결과적으로는 '오늘 회의에서 선배꺼 보면서 잘 배웠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그 선배가 어느날 갑자기 내 곁에서 사라졌다

아예 떠난 건 아니라고 했지만 언제 온다는 기약도 없이, 그 이유를 물어볼 여유도 없이 말이다

하루 아침에 선배라는 큰 보호막이 사라진 채로 나는 선배와 나누어졌던(정확히 말하자면 선배 뒤에 숨어서 드는 척만 해도 괜찮았던) 짐을 나 혼자 지게 된 것이다


상황이야 어찌됐든 회사는 굴러가야 했으니 나는 일을 해야 했다

선배가 많은 부분을 해줬던 '정답 찾기'까지 내가 해야 했으니 생각해야 할 양은 엄청나게 늘었다

내가 하는 업무가 생각을 하고 그 결과를 글로 정리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정말 미친듯이 생각하고 미친듯이 글을 썼다

한 프로젝트를 위해서 거의 100가지 넘게 생각을 하고 그만큼 글을 쓴 것 같다

나중에는 매일매일 손목이 아플 정도였다

심리적 부담과 육체적 부담이 자꾸자꾸 쌓여가는데 나는 머리를 비울 수도 자리를 뜰 수도 없는 채로 묶여있어야 했다


너무너무 힘들었지만 결과는 잘 나왔다

팀장님에게 칭찬도 많이 받았고 격려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 뒤로도 나는 계속 잘하고 싶어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서, 매번 꾸역꾸역 참고 노력했다

선배의 부재로 인해 생긴 '누군가가 책임져야 할 영역'을 감히 내가 감당하려고 했다

주제파악도 못하고 말이다

선배가 사라지자마자 "전 아직 능력이 부족해서 못하겠어요, 선배가 필요해요"라고 징징대기라도 했으면 좋았을 걸


+)

몇 달 뒤, 사수 선배의 빈자리에 다른 선배가 왔다

그런데 혼자 아등바등했던 그 시기가 내게 깊이 각인되어버린 건지 예전 사수선배에게 그랬던 것처럼 기대지 못했다

여전히 혼자 우리 팀의 일을 쳐내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불안한 채로 보낸 것이다



"보통 내 부사수들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누군가 해결해주겠지, 하고 놔버려서 내가 많이 혼냈었거든.

근데 너는 완전히 정반대인 거야. 못 풀겠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 되는데 너는 끝까지 너무 많이 생각을 하더라고.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 해. 그런 연습을 좀 하거라."

-우리 팀에 새로 온 선배가 해주신 얘기




3.

쌓인 스트레스와 상처에 대해 이야기 할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OO씨는 병원에 빨리 왔네요.

보통은 주변 사람들한테 얘기하고 풀고 그래도 정 안 되면 병원에 오거든요."

"OO씨는 고립되어 있는 것 같아요."

- 처음 정착했던 병원의 의사선생님이 내게 했던 말



사 선생님의 저 말이 정확하다

나는 고립된 인간이 맞다, 왜냐하 면 사람을 믿지 못하니까


불신의 시작이 무엇이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인간관계에 대해 아주 회의적이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아프고 슬픈 이야기를 생각없이 너무 쉽게 옮기고,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다고 해도 쉽게 믿고 마음을 열지 못한다

(그래서 내 증상에 대해 선배를 붙잡고 이야기하기까지가 너무 힘들었다. 이건 그 선배를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내 이야기를 털어놓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해서)


이렇게 내가 가진 불신으로 나는 마음의 문을 걸어잠근 채 살았고,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동시에 나 역시도 갇혀버렸다

그래서 회사에서 생긴 각종 스트레스들이 쌓이고,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딱딱하게 굳어져버렸고, 내 스스로 처치할 수 없는 수준까지 된 것이다


가끔 생각한다

만약, 내가 원치 않는 팀 변경이 불만이었다고 팀을 변경한 상사에게 말을 했었더라면

만약, 사수선배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을 때 나는 선배가 걱정되는 동시에 너무 밉기도 하다고 누군가에게 푸념이라도 했었다면

만약, 내가 혼자 일을 감당해야 했을 때 그 상황이 버겁다고 진지하게 팀장님에게 이야기했었더라면

만약, 내가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 고마운 선배를 조금만 더 빨리 찾아갔었더라면

만약, 이 상황에 대해서 구구절절 친구에게 터놓을 수 있었더라면

결과는 조금 달랐을까


처음 생겼던 홧병 같은 응어리가 더 딱딱하게 굳지 않고 풀어졌을지도 모르는데

감정조절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내 스스로가 어려워지진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머리가 고장나지도, 일 생각만 하면 무서워서 가슴이 쿵쿵거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아프지 않을 기회를 스스로 쳐내버리고 병을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팀장님 저 못하겠어요, 이건 저한테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이만큼 고민했는데 잘 안 풀려요. 선배,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까요?"

"저는 선배가 갑자기 사라져서 너무 막막하고 힘들어요. 어떡하죠"

"오늘은 제발 내 얘기 좀 들어줘. 나 너무 힘들어."

"머리가 안 돌아가요. 아무 생각도 안 나고 그냥 무서워요."

- 하고 싶었던, 했어야 했던 말들





 

내가 이모양 이꼴이 된 것에 대해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원망하곤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누구도 나를 괴롭히려고 행동한 사람은 없다


단지 내가 살아온 과정이, 내가 익혀온 사고방식이, 내가 쌓은 벽들이 나를 불안으로 몰아넣었을 뿐이다

같은 상황이었어도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프지 않을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본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아픈 것도 억울한데, 이것까지 내 탓이라고 해야 하나 속상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무엇 때문이라고 하기엔 손가락질 받을 대상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이 불안의 터널을 지나서 건강하게 살고 싶다

못하면 못하는 것에서 배우고,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고, 누군가와 도움을 주고 받고,

유치원생도 하는 이 기초적인 것도 못하는 바보같은 어른이 아니게 되고 싶다


음. 못 되더라도 "아니 그렇게 못 되면 어때?"라고 말할 수 있으면 더 좋고






"네 탓은 절대 아니지만, 네가 네 병을 키운 거야.."

- 내가 좋아하는 선배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다른 누가 했으면 많이 슬펐을 이야기인데 선배가 해주니 이 말조차도 너무 고마웠다.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빈말보다 훨씬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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