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생활자KAI Apr 27. 2020

나는 채식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문제는 소신이야!

                                                                                                                                  

혹시 정관스님 알아?” 


어느 날 S는 내게 동영상을 보여주며 "정관스님"을 아냐고 물었다. 나는 전혀 몰랐었는데, 찾아보니 한국에서 사찰음식으로 유명한 분이었다. 그녀가 스님을 알게 된 계기는 넷플릭스의 <Chef’s Table>이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고 언젠가 백양사 쿠킹 클래스에 참여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S뿐만 아니라 내가 만난 독일 사람 중엔 채식주의자가 참 많았다. 통계만 봐도 독일의 채식주의자 비율은 전체 인구의 대략 14%, 800만여 명에 이른다. 때문에 독일에서 손님을 초대하거나 음식을 만들어 갈 일이 생기면 상대가 채식주의자인지를 사전에 물어보는 것이 필수다. 그렇다고 모두가 채식주의자를 반기냐? 의외로 그것도 아니었다. 



“맙소사!! 오늘 내 동생이 채식주의자를 선언했어.”


얼굴이 울그락 붉으락이 되어 나타난 C의 전언이었다. 동생이 채식주의자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가족 모두가 선택은 인정하되 달가워하진 않았단다. 심지어 C는 엄청난 육식주의자였고, 어머니는 말없이 그 자리에서 나가버리셨다고 한다. 뭐랄까. 채식주의자 선포는 일생일대의 커밍아웃 같은 것이었다. 지지하는 가족도 있고 당연히 A 어머니처럼 좋아하지 않는 분도 계신다. 


보통은 다이어트로 시작했다가 몸이 좋아지는 것을 느껴서 채식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반려동물을 키우거나 동물 학대 다큐멘터리, 친구의 권유 등 계기는 여러 가지이지만 주된 이유는 ‘환경’이다. 환경에 대한 독일인들의 관심은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한 예로 네스프레소에서 일하는 C 말로는 회사 입장에서 독일은 별로 좋은 시장이 아니라고 한다. 미세 플라스틱을 유발하는 커피 캡슐보다는 여전히 아날로그 커피 추출 방식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신제품은 보통 아시아에서 먼저 출시한다는데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대략 난감.;


나 역시 <육식의 종말>이란 책을 보고 잠시 채식을 고민한 적이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죄책감에 휩싸였고 평소에도 고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어서 시도는 했었다. 하지만 가끔은 햄버거가 먹고 싶었고, 한우의 육즙 앞에서 침샘이 고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채식에 최상의 조건을 갖춘 독일에 살게 되면서 다시 관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역시 쉽지 않았다. 채소와 과일은 참 맛있지만 문제는 치킨과 스테이크도 몹시 맛있다는 데에 있었다. 한 번은 식욕을 이기지 못하고 타협점으로 채식주의자용 소시지를 구입한 적이 있다. 야심 차게 칼집 낸 소시지를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지글지글 구워서 한 입 베어 문 순간! 불쌍한 나의 혀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꿈틀대더니 급기야 미각의 방향성을 상실했다. 


모양은 멀쩡한 소시지인데 표현하기 힘든 맛없는 그 맛이란.. 두부에 진흙을 섞어서 찐 느낌이랄까. 질척거리는 질감의 이 소시지는 맛없기로 소문난 독일의 유일한 대표 음식인 소시지에 대한 모욕이었다. 음식이라고 지칭할 조차 없는 이 정체불명의 녀석을 통해 나는 채식주의자에게 백기를 들었다. 



사실 소시지는 핑계고 문제는 내 소신이었다.


 뭐든 마음먹은 대로 하는 것이 어렵지만 특히 본능적인 식욕을 억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매번 시도했다가 포기한 전력이 있는 나로서는 그래서 독일의 채식주의자들이 근사해 보였다. 환경을 생각하는 의식도 높이 살 만하지만 핵심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살아가는 데에 있었다. 채식주의자란 것이 단순히 고기나 유제품만 안 먹는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주제 자체가 바뀌는 일이었다. “야수성이 없는 세상, 폭력도 강요도 없는 평등한 자유의 삶, 자연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존재. ” 한강 작가가 소설 <채식주의자>에서 말하고자 했던 주제 의식을 독일 채식주의자들은 실천하고 있었다. 


꼭 채식주의자뿐만이 아니었다. 동성애, 장애인 등 소수의 문화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의식 수준은 가히 선진국이라 할 만했다. 내가 일일이 자세히 다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이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신의 주관이 서 있었고 이를 지키면서 살아간다. 동시에 상대의 입장에도 항상 관심을 갖는다. (그렇다고 자기주장을 잘 꺾지는 않는데 어쨌든 상대의 의견은 항상 물어본다.) 때로는 고집이 세고 꽉 막혔다는 인상도 주지만, 스스로에 대한 뿌리 깊은 확신을 갖고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곧잘 갈팡질팡하는 나에게 신선한 감흥을 주었다. 그들이야말로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소크라테스의 말을 제대로 행하고 있었다. 


나를 잘 알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 즉 마음먹은 대로 산다는 것이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솔직히 가끔은 똑 부러지게 살고 싶다가도 가끔은 안 그래도 복잡한 세상 대충 좀 편하게 살고 싶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두 명 아니 너무 많은 내가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가뜩이나 많았던 ‘나’가 독일과 한국 문화의 충돌에 의해 더 자주 탄생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다’라는 노랫말은 인간을 너무나 잘 묘사한 가사다. 오늘도 나는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은 잡식주의자로 수많은 나를 품고 살아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브런치를 하는 이유/독일 생활의 8할은 글쓰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