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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생활자KAI Oct 29. 2019

독일에 처음 온 이방인을 향한 당부, 겨울을 조심하세요

독일의 겨울: 낮은 밤, 밤은 깊은 밤



인터넷에 종종 회자되는 독일의 겨울


썸머타임이 끝났다.

이는 호우시절 엔딩을 의미했다.

“낮은 밤이요 밤은 깊은 밤”



혹독한 계절이 시작된 것이다.

썸머타임의 타이밍은 실로 절묘해서 썸머타임이 끝나면 희한하게 밤이 한층 길어진다. 지금은 오후 5시만 넘어가면 어두워지는데 아마 11월 중순 즈음 되면 오후 4시만 되어도 깊은 밤이 될 것이다.


“지금은 여름이라 괜찮은데,
겨울이 진짜 힘들어요.
겨울을 조심하세요”


처음 독일에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일관되게 언급한 말이었다.


“왜 그토록 겨울을 두려워할까?”

이 화창한 여름에 미리 겨울을 걱정하는지 이해가 안갔지만, 나는 이내 그 의미를 깨달았다. 매일이 어두운 나날들이다. 건조한 여름과 달리 겨울은 비가 많이 와서 축축한 공기가 늘 부유한다. 게다가 무뚝뚝한 독일 사람들의 표정으로 가득한 겨울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이 날씨가 지독히도 싫어서 어디로 떠날 궁리만 했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일까. 시간이 흘러 두 번째, 세 번째 겨울을 맞이하면서 내 마음은 약간 달라진 상태로 계절을 받아들이고 있다.


칠흑같은 계절의 변화를
내 몸은 투명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해는 짧지만 길어진 밤 덕분에, 초를 켜고, 차를 마시고, 재즈를 듣는 시간이 늘었으며, 집의 분위기는 한층 다정다감해졌다.


문득 내가 이렇게 계절의 변화를 시시때때로 민감하게 느꼈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며 낮에는 빌딩 숲에 있느라, 밤에는 피곤에 지쳐 잠에 드느라.. 계절이 오가는 것을 눈치 채기도 전에 놓치기 일쑤였다. 그러고 보니 흔한 꽃구경 한 번 못 가봤다. 자연의 변화보다는 내가 하는 일의 변화, 시청률의 변화에만 급급한 10년이었다.


돌이켜보면 매일매일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쏜살같았던 서울의 시간이었다. 독일에서의 시간은.. 뭐랄까. 사계절의 흐름을 내 눈으로, 내 몸으로, 내 피부로 온전히 느끼며 살고 있다.


시간의 상대성


우리 모두에게는 똑같은 시간이 주어지지만 시간의 속도는 시공간에 따라 다르다. 시간의 상대성이란 말을 불현듯.. 실감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의 시간이 완전히 나빴다고도 할 수 없다. 어쩌면 그러한 시간을 보냈기에.. 지금 이 시간의 소중함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넌지시..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일상한 한 켠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감을 바라본다. 거리의 풍경은 차갑지만 그 속의 사람들은 따뜻해 보인다.  아이와 함께, 반려견과 함께, 배우자와 함께.. 그렇게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 살갑다.



독일의 겨울 풍경을 보노라면, 회색을 자주 썼던 화가.. 벤 아론슨 (Ben Aronson, 미국)이 생각난다. 주로 회색빛 도시를 그리는 그는 현대판 에드워드 호퍼 같다. 도시를 그렸지만 호퍼처럼 그 속에 사는 사람이 더 크게 보인다. 어쩌면 그래서 쓸쓸해 보이는 호퍼의 사람들과 달리, 벤 아론슨의 사람들에게서는 따뜻한 감성이 느껴진다.


색은 시리지만 터치감은 온화하다. 섬세한 붓 터치가 아닌데, 분위기는 깊다.

그녀의 회색옷이 무심한듯 시크해 멋져보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색인 회색은 어떤 색과도 잘 어울린다.

튀지 않고 싶어서 회색을 선택하는 이도 있겠지만 현대인은 소위 꾸안꾸, 꾸민 듯 안 꾸민듯 프렌치 시크처럼 보이고 싶어서.. 회색을 택하기도 한다.




현대인의 욕망, 회색


그런 면에서 회색은 현대인의 드러나지 않는 욕망을 상징하는 듯 도 하다.

꾸민듯 안 꾸민듯, 점잖은듯 유머스러운듯 세련된 지식인의 모습 같은 것.. 그런 것..

자연스러운 그레이 옷을 입고..

태양이 자오선을 지나갈 때 즈음 커피 한 잔을 머금는 여유..

도시인들에게는 소소한 기쁨의 순간이다.

선글라스를 낀 채 온 몸으로 해를 맞선 그녀는 회색빛 도시가 꼭 나쁘지만은 않다고 말하는 듯 하다.

독일의 겨울도 그렇다. 바쁜 업무 중 마시는 커피처럼, 잿빛투성이지만 그림 속 커피처럼 위안을 주는 것들이 있다.


커피, 차, 촛불, 크리스마스, 글뤼바인, 슈톨렌..

벤 아론슨, 그리고 지금 듣는 키스 자렛..

이런 잔망스럽고 따뜻한 삶의 편린들이 마치 구슬처럼 엮이어, 삭막한 독일 겨울이 꽤 근사한 겨울 풍경으로 내 기억에 남게 될 것같은 예감이 든다.


어쩌면 이곳에서 나는
우울의 얼굴을 다르게 보는 법을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실내 분위기를 한 2도 즈음 올려주는 키스자렛(Keith Jarrett)의 음악을 듣는다.


January, 24, 1975
독일 쾰른 콘서트 실황연주 PART 1.


그는 몹시 추웠을 1월의 쾰른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차가운 공기를 한 가득 머금었지만

곧 함박눈이 내릴 것 같은..

시린 하늘을 기꺼이 품었지만

곧 햇살이 내려쬘 것 같은..

기.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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