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영화에 거칠었던 파리의 길거리 시장, 생선가게가 등장하더니, 오늘도 역시나 파리로 떠나네요?
공간도 파리지만 오늘은 시간 여행도 조금 해보면 어떨까 싶은데요? 과거로. 또 과거로, 또 과거로.
얼마나 과거까지 가시려구요, 진짜 가능하기만 하다면 과거로의 여행은 꼭 한 번 가보고 싶네요.
기간이 기간이니 만큼 곧 학생들 방학도 맞이할 시기인데, 방학마다 역사적 유적지나 여행 떠나셨던 분들, 이번엔 코로나 19로 여러 제약도 많으니 이런 영화로 시간 여행이라는 체험을 안겨줘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아는 그런 위대한 분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여행이죠.
에디슨, 베토벤 같은 우리가 동경하던 위인들의 시대로 떠나는 작품 <미드나잇 인 파리>입니다.
아.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으로 채워져 있던 영화 포스터가 기억나네요.
포스터부터 몽환적인 파리의 거리를 담고 있었죠. 영화 속에서도 파리의 구석구석이 마치 그림처럼 채워져 있어요. 소리를 끄고 화면만 봐도 감동을 받을 만큼 아름답죠. 포스터에 ‘전 세계를 사로잡은 황홀한 시간여행’이라는 로그 라인이 적혀있습니다.
그 황홀한 여행의 시간대가 바로 미드나잇이군요? 자정, 한밤중이란 뜻인데 사실 그 시간대는 공포영화 시간대 아닙니까? 한밤중에 위인들을 만나다. 뭔가 유령을 만날 것 같은 묘한 두려움도 드는데요.
그런가요. 일단 기대하셔도 좋을 이유 중 하나. 세계적 거장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입니다. 우디 앨런은 60년대부터 지금까지 감독이든 주연이든 영화로 무려 85편의 작품을 남겼고 성인이 된 후론 거의 영화에 올인한 것과 다름없어서 2014년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선 평생 공로상까지 받았죠. 1935년생이세요. 그런데 아직도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하신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이미 감동은 끝났습니다. 과거 위인 만날 이유가 있나요. 현시대에 이미 이런 분이 계신데. 여든 넘은 연세에 아직 직접 각본 쓰고 연출하신다니 그 열정만으로도 정말 감동이네요. 우디 앨런 영화의 특징이, 영리한 대사와 감각 넘치는 유머 아닌가요?
관객의 개인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죠. 오늘 등장하는 주인공 직업이 특히나 언어의 귀재 소설가입니다. 길이라고 불리는 이 남성 소설가는 약혼녀와 함께 파리로 여행을 가요. 길은 평소에 동경하던 파리의 낭만을 즐길 기대에 차있었는데요, 약혼녀는 화려함을 즐기고 싶어 합니다. 의견 차이로 다툰 길은 혼자서 술 한 잔을 하고 파리의 밤거리를 걷기 시작하죠.
뭔가 사건이 일어나려면 꼭 이렇게 동행하던 사람과 헤어져 혼자 있게 되는 법이죠.
그렇죠. 터벅터벅 밤거리를 걷고 있을 때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더니 어디선가 오래된 클래식 푸조 한 대가 달려옵니다. 길이 바라보자 안에 탄 사람들이 '어서 차를 타!' 하며 외치죠. 엉겁결에 올라탄 길은 그대로 황금시대라 불리는 1920년대의 파리, 어느 파티 장소에 도착하게 돼요.
어리둥절한 길이 파티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는데요. 첫 번째로 인사를 나눈 사람이 놀랍게도 위대한 개츠비를 썼던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였죠. 길은 지금 황홀하여 넋이 나가려고 해요. 다음 저기 구석진 곳에 마초 분위기를 풍기며 한 남자가 앉았죠.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그 남자가 이렇게 대답해요.
"반갑소. 나는 헤밍웨이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스틸컷
오. 재밌네요. 어니스트 헤밍웨이!대단하네요. 생각해 보니 실제로 1920년대는 세계 여러 나라의 천재적 예술가들이 파리에 다 모였을 때네요. 때마침 소설가였던 길의 입장에서는 동경하는 롤 모델들이 대거 활동하던 시대라 정말 흥분되었겠습니다. 또 다른 예술가도 등장하나요?
유명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등장하죠. 살바도르달리, 또 초현실주의로 유명한 영화감독 부뉴엘 같은, 감히 눈도 못 마주칠 것 같은 전설적인 예술가들이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길은 그들과 친구가 되어서 매일 밤 꿈같은 시간을 보내게 되죠.
이쯤 되면 뭐, 아까 헤어진 약혼녀 생각은 전혀 나지도 않을 것 같네요. 동경하던 세계적 거장들을 만나는 뜻깊은 순간이지 않습니까.
사실 더욱 그럴 것이, 위인은 아니지만 영화 속에 가상 인물이 한 명 더 등장하는데요. 유명한 거장들의 연인이라 불리는 '아드리아나'라는 여성이죠. 이 아드리아나의 매혹적인 미모 때문에 영화를 보시는 남성분들도 빠져들지 않을까 싶네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스틸컷
역시 화려함만 좇던 약혼녀가 아닌 또 다른 여인까지 등장하고 말았네요. 그렇다면 길과 아드리아나의 결말까지도 궁금해지는데요?
고전적 미모가 극에 달하는 아드리아나와 길의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 보시라는 의미로, 아쉬운 채 건너뛰구요, 대신 중요한 사실을 알려 드릴게요. 길은 자신이 무척이나 동경하던 시대인 1920년대를 실제로 살고 있는 아드리아나에게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죠. 정작 1920년대를 살고 있는 아드리아나는 그 시대를 보잘것 없이 여긴다는 점이에요. 아드리아나는 그보다 더 과거인 1890년대를 꿈의 시대라며 동경하고 있던 거죠.
아드리아나에게는 1920년대가 현재일 테니까그녀는 그녀로부터 또 과거가 되는 1890년대를 동경하는 거군요.
네. 길은 운이 좋습니다. 결국 아드리아나가 꿈꾸던 1890년대까지 함께 가게 되죠. 그곳에서는 고갱, 드가, 포트 렉 같은 유명한 화가들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데요, 이때 길의 명대사가 탄생하죠.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우린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환상들은 없애야 해요. 과거에 살았다면 행복했을 거라는 환상도 그중 하나일 테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스틸컷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인간의 환상은 크다고 하죠.그중 뻔히 불가능할 걸 알면서 ‘과거로 돌아간다면’이라는 가정을 제일 많이 한다고 합니다.
‘학창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가 조금만 젊었다면’ 같은 말들을 안 해본 사람이 없다고 해요.
그러나 오늘도 언젠간 과거가 되겠죠? 그리고 그 과거는 언제나 기억 속에서 아름다울 겁니다.
헤밍웨이의 명대사 한 번 되새기며 이야기 마무리할게요.
관객 중 글 쓰시는 분들은 작품 속 헤밍웨이의,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한 조언이 가슴에 꾹 박히실 겁니다.
억압된 순간, 역경 속에서도 용기와 품위를 단연코 지킨다면.
제목은 뭐가 되어도 상관없지, 이야기에 진심이 담겼다면
영 아닌 소재란 없지, 내용에 진실이 있다면
문장이, 꾸밈없고 간결하다면.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스틸컷 _ 헤밍웨이 대사
누구나 환상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동경하고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환상과 동경에서 벗어나, 실로 진정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을 느껴야 할 시점은 바로 지금이라고 영화가 말해주고 있네요.
이 순간이, 미래의 어느 누군가에겐 동경하는 과거가 될 테니까요.
우디 앨런 역시 미래엔 누군가가 동경하는 과거의 감독이 되어있겠지요.
그런 현재를, 그런 지금을, 오늘을 살아야 한다고, 고요한 미드나잇에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작품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