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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따가 Oct 25. 2020

쉬어가야 더 멀리 갑니다

다친 김에 쉬어가기 어떻습니까.

새로 산 핸드그라인더를 닦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자주 다치던 어릴 적에는 피를 봐도 두렵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아파!' 정도였는데, 무엇이 변한 걸까. 어른이 된 나는 피를 보자마자 '아파!' 대신 '망했다!'라고 말해버렸다. 



'빨리 나아야 하는데, 얼마나 깊이 베였지?'
'벌써 씻어놓은 마늘은 다져야 하는데 이 손으로 괜찮을까'
'아... 운동은 또 쉬어야겠네... '


해야 하지만 하지 못하는 일들에 손가락이 아프기보다는 짜증이 먼저 났다. 그리고 다른 마음 한 켠에서는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좋았다. 지금 중요한 건 '피가 멎고 살이 붙는 일'이었다. 좋은 핑계가 생겼다. 다른 일들은 이제 뒤로 미뤄둬도 괜찮았다.


집안일은 쌓여만 가고. 식단관리와 홈트레이닝은 중단했다. 다행히 깊게 다친 건 아니었기에 조심해서 하자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아프면 쉬어야지'라는 말은 짜증과 무기력으로 해야 할 일들을 놓아버리기 너무 좋은 핑계였다. 손가락 하나 다친 게 문제가 아니다. 난 아무것도 안 할 핑계를 어떻게든 찾고 있었나 보다. 욕심 많고 게으른 나는 스스로를 다그치며 하기 싫은 일들을 해오고 있던 걸까. 



다친 김에 쉬는 게 뭐 어떤가


요즘 집에서 풀업을 한다. 꾸준히 하니 등이 넓어지는 게 눈에 보여서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다. 때로 과하게 욕심을 부려서 쉬는 날 없이 운동을 할 때도 있는데, 이렇게 욕심을 부릴 때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개수가 늘어나질 않는다. 근육은 쉬는 동안 회복을 하며 근섬유가 늘어나면서 더 많은 힘을 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회복의 과정 없이 무리하게 운동을 하면 오히려 운동 수행 능력이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쉬는 동안 단단해지는 건 근육만의 일은 아닌 것 같다.


2주 만에 다 나았다. 새 살이 솔솔


어른이 되어 다치는 감각은 익숙하지 않다. 아마 실패하지 않으려 더 조심하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우리는 실패를 하고 쉬기도 해야 다음에 더 잘할 수 있다. 해야 할 일들과 하고 싶은 욕심 앞에서 어릴 적 잘 해오던 '아무것도 안 하기'와 '실수하고 엉망으로 만들기'를 잊고 말았다. 난 더 다치고 싶지 않아 움츠리기만 한다. 


손가락은 2주가 채 안되어서 다 나아버렸다. 아직 빨간 피가 다 비치는 얇은 피부이지만 이렇게 새살이 돋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고 내 몸이 대견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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