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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Sep 15. 2021

플랜 비 라이프 (Plan B Life)

짧은 픽션 05


*


그녀의 습관은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계획의 즐거움을 즐겼다기보단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의 좌절감을 느끼는 걸 싫어한 게 컸으니 좋아하는 일이라기보단 습관에 더 가까웠다. 그녀는 늘 계획을 세웠다. 물론 그 계획대로 되지 않을 시에 이행할 플랜비(Plan B)까지. 그러므로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일은 연애였다. 


4살 연상의 남자와 연애를 할 때였다. 그날은 서로 바빠 약 보름 만에 만나는 날이었다. [우리 오랜만에 보니까 점심엔 여기서 파스타를 먹고, 수목원에 구경 갔다가… 여기 카페 갔다가 마지막엔 자기네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 시켜가지고 영화 보면서 먹자] 이어서 몇 장의 사진이 로딩됐다. 그의 메시지였다. 그녀는 그가 말한 곳들을 지도로 찍어보았다. 식당은 염리동이었고, 수목원은 마곡나루였고, 카페는 다시 합정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집은 종로.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우리가 내일 여기를 다 가? 그는 말했다. [응 다 가고 싶어! 지하철이랑 버스 좀 여러 번 타야겠지?] 그녀는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그에게 어떻게 반대 의견을 제시할지 고민하다 솔직하게 말했다. 동선이 너무 별로야. 수목원은 나중에 가고 식당이랑 카페 중에 더 가고 싶은 곳 하나만 고르자. 나머지 하나는 그 근처에서 해결하자. 염리동이어도 합정까지 버스 타고 그래야 되잖아. 그리고 우리 집에 가는 건… 내일 나 출근하니까 이따 컨디션 봐서 결정하자. 그녀는 조심스럽게 전송을 눌렀다. 그가 갑자기 말이 없어 잠깐 동안 그가 준비한 계획에 너무 반대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쯤 답장이 왔다. [그래 상관없어!]


그는 합정의 카페 말고 염리동 식당을 골랐다. 여기 파스타가 그렇게 맛있대. 언덕을 오르면서 그가 말했다. 그녀가 파스타를 좋아한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예쁨과 칭찬을 바라는 그를 보며 연애도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언덕을 다 오르고 가게에 들어가기 전까진. 가게에 들어갔는데 요리사며 종업원이며 놀람과 의아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들을 봤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예약… 하셨어요? 그녀는 그를 쳐다봤고 그는 아니요,라고 말했다. 그들은 가게를 나왔다. 인스타그램에 식당 이름을 치니 프로필에 ‘반드시 예약해 주세요’라는 문장이 빨간색 중요 표시 이모지와 함께 쓰여있었다. 도대체 왜. 이걸 검색을 안 하고 이 언덕을 오르게 했을까. 언덕을 내려가면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 옆에서 그는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계속 아 이 근처에… 어… 아… 돈까스 괜찮아? 아 아니다 돈까스 싫어한댔지… 아… 그러면 합정 그쪽 갈까? 식당을 실패했으니 합정으로 이동해 근처에서 밥을 먹고 처음 계획에 있던 카페를 가자는 말이었다. 버스를 타고 합정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동안 그는 핸드폰을 뒤지더니 일식집을 보여줬다. "여기 가자!” 이번에는 건물이 임대 중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식당은 브레이크. 그들은 결국 골목의 백반집을 들어갔다. 테이블이 끈적끈적하고 그릇을 몇 번은 바꿔야 하는 그런 백반집. 그리고 찾아간 카페엔 자리가 없어 그녀가 이전에 가봤던 카페에 갔다. 그녀의 집에 가자던 계획은 암묵적으로 취소됐다.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플랜비를 좀 세워놓지 그랬어”


*


2살 연하의 남자와 연애를 할 때였다. 보고 싶다며 갑자기 집 앞에 불쑥 나타날 때부터 그녀는 어렴풋이 앞날을 짐작했다. 어떡하지. 이 연애 무를까. 그래도 초반이라 그런 거겠지 싶어 우선은 더 만나보기로 했다.  정말로 그건 초반에만 있는 에피소드로 그쳤는데, 중반이 되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남자는 가끔씩 아침에 섹스를 요구했다. 물론 아침에 할 수도 있는 거지만 여유 없이 출근을 해야한다는 사실이 난감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만. 빨리 끝낼게’라며 졸랐다. 그녀는 하는 수없이 섹스를 하고, 택시를 탔다. 


그는 충동적인 사람이었다. 섹스뿐만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그녀와 그가 다툴 때면 그는 몇 날 며칠 잠수를 탔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하거나 집 앞에 나타났다. 꼭 둘 사이의 다툼으로만 그랬던 건 아니다. 그가 하고 있는 공부가 잘 풀리지 않을 때, 그가 가족과 마찰이 있을 때, 그가 자유를 느끼고 싶을 때. 그때마다 그녀는 갑작스럽게 혼자 있어야 했다. 그런 상황이 몇 번쯤 반복됐을 때, 그녀는 오히려 그가 떠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혼자 남겨지는 것보단 계속 혼자인 게 나았다. 네 기복을 받아주지 못하겠어. 그녀가 집 앞에 서있는 그를 보며 말했다.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항상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잘 지내라고 말했다. 생각보다 잔잔한 이별에 그녀는 마음을 한시름 놓았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그녀의 집 문을 쾅쾅 두드렸다. 문을 여니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가 울면서 그녀를 와락 안았다. 너 없이 못 살겠어. 그날 그녀는 그를 옆에 재웠고, 잠드는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9시에 일어나서 대충 씻고, 아침은 회사에 가서 먹을 수 있는걸로 챙기고, 포스트잇을 남겨놓자. 


그녀는 계획대로 9시에 일어나서 바나나와 요거트를 챙기고, 포스트잇을 집었다. [출근이라서 먼저 나갈게] 그녀는 냉장고에 그 포스트잇을 붙여놓고 신발을 신으면서 생각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도어록 비밀번호를 바꿔야지. 그녀는 퇴근 후에 그가 절대로 짐작할 수 없는 숫자의 조합으로 비밀번호를 바꿨다. 그가 더 이상 집에 올 수 없도록. 그의 플랜비가 먹히지 않도록.


*


마지막으로 동갑인 남자. 빠른 년생이니 어떻게 보면 그녀와 완전히 같은 나이라고 하기엔 애매했다. 그는 이전에 만났던 남자들과는 다르게 계획을 빈틈없이 잘 짰다. 그런 그를 보며 그녀는 미래를 생각하게 됐다. 난생 처음 안정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와 함께 있을 때면 플랜비를 생각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아니면 어떡할 건데, 이 사람이 안 좋아지면 어떡할 건데, 같은 생각. 하지만 그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그녀는 계획 없이 슬퍼졌다가 기뻐지기를 반복했다. 고로 그를 사랑하는 게 힘들어졌다. 그와 5분 남짓한 통화에도 기분이 좋아져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를 모두 다 받을 수 있다가도, 그가 딱히 별말을 하지 않더라도 상처를 받아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맛없게 느껴져 버리기도 했다. 그녀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 마음이 죽기보다 싫었다. 그녀는 그때부터, 플랜비를 짜기 시작했다. 그와 헤어진다면. 정확히 말해서 그가 떠난다면. 그녀는 우선 미뤄왔던 냉장고 정리를 하고, 이번 업무가 끝나면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나니 나날이 식어가는 그의 마음이 더 잘 보였다. 그녀는 계획의 순서를 바꿨다. 여행을 먼저 갔다가 돌아와서 냉장고 정리를 하기로. 알아본 티켓 중 가장 저렴한 날짜는, 바로 일주일 뒤였다. 그녀는 회사에 바로 연차를 결재받았다. 그리고 그에게 연락을 했다. 오늘은 바빠도 만나야 돼. 그녀는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그와 그녀 둘 다 비슷하게 좋아했던 레스토랑. 그녀는 밥을 다 먹고 얘기를 할 계획이었다. 헤어지자고. 그리고 일주일 뒤, 여행을 가버리기로. 맞은편에 그가 앉았다. 모든 접시에 있는 음식이 반 이상 사라졌을 때, 그녀는 예감했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의 마음은 그녀의 계획에 동참할 수 없다는 것을. 


“근데 오늘 할 얘기 있어? 바빠도 만나야 된다고 했잖아”


“응? 아...”


그가 그녀에게 그렇게 질문하는 순간 가게의 조명이 조금 더 내려갔다. 어두워진 가게는 더 로맨틱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에게 다시 초점을 맞췄다. 아니 그게...


“어... 이번 주에만 와인이 할인된대서”


아 뭐야 긴장했잖아, 그가 그렇게 말했다. 혹시나 안 좋은 말 할까 봐 얼마나 긴장했는데, 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녀는 살짝 어색하게 웃었는데, 좀 전에 내려간 조명 덕분에 그 어색함은 숨겨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계획에 없던 거짓말을 잘 생각해낸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꼈다. 그녀가 그에게 이번 주에만 할인되는 와인을 따라주었다. 속으로는 티켓 취소 수수료를 검색할 계획을 세워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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