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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Sep 15. 2021

더 주세요

짧은 픽션 04

*


소시지 두 개, 양파와 피망 세네 조각이 은하의 반찬 칸에 담겼다. 은하가 고개를 들어 흰색 옷을 입은 중년의 여자를 쳐다봤다. 


“헐 이것밖에 안 줘요?”


“아니 이게… 양이…”


“좀만 더 주세요”


중년 여자가 곤란하다는 듯 오른쪽 끝에 서있는 젊은 여자를 흘끗 본 후, 소시지 두 개를 더 담았다. 뒤이어 영지였다. 영지에게도 소시지 두 개, 양파와 피망 세네 조각이 담겼다. 중년 여자가 슬쩍 영지의 눈치를 봤다. 영지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듯 숙여 짧게 인사한 후, 몸을 왼쪽으로 옮겼다. 은하의 뒤를 따라 걸었다. 빈자리에 앉았다. 


“진짜 조금 준다. 오늘 먹을 거 이거밖에 없으면서 소시지 두 개가 뭐냐. 어 뭐야, 너 더 달라고 안 했어?”


“응 그냥 어차피 오늘 맛없으니까. 대충 먹고 매점 갈래”


은하가 영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수많은 아이들의 급식판엔 소시지의 개수가 제각각이었다. 남자애들은 기본적으로 4개를 받는 듯했고, 여자애들은 대부분 2개였다. 영지와 은하는 젓가락질을 몇 번 정도 하다 급식실을 나왔다. 그날 급식은 영지와 은하에게만 맛없던 게 아니었는지, 매점은 다른 날보다 인산인해를 이뤘다. 둘은 빵과 음료수를 들고 운동장 벤치에 앉았다. 


“나 어제 홍기랑 또 싸웠다”


“어쩌다?”


“게임한다고 통화 나중에 하자고 하더니 전화가 없더라고. 그래서 내가 전화했는데, 노래방인 거야. 그래서 또 끝나고 전화하겠대. 그러더니 그다음 날 아침에 덜렁 ‘미안 잠들었다’라고만 보내 놨더라. 내가 나는 너 연락 기다리느라 잠도 못 잤었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막 뭐라고 했지”


영지는 은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리곤 은하에게 초콜릿 한 조각을 떼어줬다. 위로를 상징하는 영지의 행동에 은하가 마음이 녹았는지 자연스레 웃었다. 따뜻한 바람이 둘의 교복을 좌우로 조금씩 흔들었다. 수업 시간이 임박했다. 은하와 영지는 교실로 돌아갔다. 


이번 주 주번인 영지는 아이들이 모두 돌아간 교실을 빗자루로 쓸었다. 칠판지우개를 정리하고, 구석구석을 닦았다. 마지막으로 걸레를 빨아 걸어놓은 뒤, 가방을 들고 나왔다. 영지를 기다리던 은하가 밝은 얼굴로 영지에게 팔짱을 꼈다. 


“너는, 준석이랑 잘 돼가?”


“그냥 뭐… 연락은 계속해 가끔 보기도 하고”


영지의 대답에 은하가 부끄러운 얼굴로 꺄악 거리며 반응했다. 영지는 그런 은하의 반응이 쑥스러워 대화 주제를 넘기고 싶어 했다. 안타깝게도 은하는 그런 영지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은하는 계속해서 영지에게 준석과의 감정을 물었다. 


*


은하와 홍기, 영지와 준석. 그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시점에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가 유지됐다. 홍기가 집과 거리가 먼 대학에 입학하면서 자취를 시작해 은하와 홍기는 그 시점에 다툼이 잦아졌다. 자주 볼 수 없으니 연락이 중요한데, 홍기는 고등학교 때 습관을 고치지 못했고, 은하는 그런 홍기를 참을 수 없는 게 그 다툼의 근원이었다. 반면에 영지와 준석은 전혀 다투지 않았다. 은하는 영지에게 늘 본인의 연애 얘기를 늘어놓다가 맨 마지막엔 이렇게 말했다. 너넨 진짜 안 싸운다. 그건 홍기와 준석도 마찬가지였다. 홍기도 은하와 다툰 뒤에 준석과 함께 있을 때면, 은하와의 연애를 말하다 은하처럼 말했다. 너넨 진짜 안 싸운다. 


은하와 홍기는 둘이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가 없을 때에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반대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영지와 준석은 다른 표정을 지었다. 준석은 어딘가 아리송하고 찜찜한 표정으로 ‘맞지, 우린 안 싸워’라고 대답했고, 영지는 다 안다는 표정으로 ‘그냥 뭐… 그다지 싸울 일이 없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영지와 준석도 서로가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 몇 번쯤 반복하며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었을 때, 먼저 헤어진 쪽은 영지와 준석이었다. 은하는 깜짝 놀라 영지에게 물었다. 한 번도 싸운 적 없던 너네가 갑자기 왜? 무슨 일이야? 준석이 그 새끼가 바람났구나. 대학 가서 바람났지? 


“아니야 그런 거. 우리는… 그냥… 아니, 나는 그냥 준석이한테 여기까지인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준석이 그 새끼 진짜 바람났구나”


은하는 계속 ‘아니야 그런 거’, ‘그냥 헤어진 거야’라는 두 문장만 이어 붙였다. 홍기도 준석에게 물었다. 뭔데, 한 번을 안 싸우다가. 권태기? 잠깐 헤어진 거지? 준석은 이번에도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몰라. 난 모르겠어. 영지가 날 사랑하는지 모르겠어. 걔 마음을 도무지 모르겠어.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불분명한 이별을 겪은 그들에게 은하와 홍기는 어설픈 위로를 전했다. 


*


영지가 은하네 학교에 놀러 갔다. 은하가 계속해서 학식이 맛있다고 여러 차례 사진을 찍어 전송을 했었다. 언제 너 공강인 날 꼭 와서 나랑 같이 먹자. 은하가 그렇게 몇 번을 말했었다. 영지는 낯설면서도 다 거기서 거기구나, 하는 생각을 번갈아 하며 은하네 학교를 걸었다. 메뉴는 김치볶음밥과 장조림, 간단한 반찬들이었다. 


“여기 장조림이 뭔가 맛있거든? 막 대량으로 안 하나 봐. 근데 어차피 학식 많이 안 먹어서 더 달라고 하면 더 주니까 말해도 돼 더 달라고”


은하는 오늘도 ‘더 주세요’를 말했다. 영지는 오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은하는 영지의 식판을 보며 말했다. 더 달라고 하지! 영지는 웃으며 배가 많이 고프지 않다고 말했다. 커피를 들고 은하의 학교를 걸었다. 은하가 영지에게 팔짱을 꼈다. 왠지 살이 아니라 뼈가 닿는 느낌에 은하가 말했다. 


“어째 더 말라진 것 같다. 하긴, 나야 맨날 맛있는 거 보면 더 주세요 하고 너는 주는 대로 받으니까”


영지가 은하를 보며 약간, 숨기고 싶어 하는 부분을 들킨 듯 멋쩍게 웃었다. 은하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하다 자연스레 홍기와 최근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영지는 은하의 말을 들으며 커피 홀더를 만지작거렸다. 


“있잖아, 생각해 보면 내가 그래서 준석이랑 헤어졌던 것 같아. 음… 그니까… 더 달라고 안 해서?”


은하가 기겁해 손을 입으로 가렸다. 세상에, 맞네 맞아. 맞아. 너는 학교 다닐 때부터 한 번을 더 달라고 하지를 않았었어. 그게 연애에서도 그랬던 거구나. 빠른 템포로 흘러가는 은하의 말에 영지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안 되겠어 나랑 연습하자. 너 빨리 나 따라 해 봐. 더- 주-세-요-”


영지가 조금 더 웃다 은하의 재촉에 못 이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몇 번 헛기침을 한 후, 영지가 숨을 고르고 말했다. 더- 주-세-요-. 영지는 처음으로 발음해보았다. 더- 주-세-요-. 세 번 정도 반복했을 때, 은하가 영지에게 말했다. 


“그래. 이젠 달라고 해. 더 많이 받을 수 있을 거야”


“소중한 사람이 생기면, 정말로 더 달라고 말해볼게. 받지 못하더라도”


둘은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위로를 상징했다. 이례적으로 완벽한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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